한국에는 '정치'(politics)가 없다. '복수'(revenge)만 있을 뿐이다. 한국의 정권 교체는 복수극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암살되거나, 자살하거나, 탄핵되고, 감옥에 간다. 복수는 또 다른 원한을 낳고 그 한을 풀기 위해서 세를 불리고 표를 모아 선거에서 이김으로써 '한풀이'를 한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수평적 정권 교체'는 한국 정치의 전근대성, 원시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복수는 인간 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규범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의'는 '복수'와 동일시되었다. 반면 민주공화정은 '복수'를 금하고 '공적 차원'의 사법 질서를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체제다. 복수는 민주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야만적인 행위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복수의 악순환일 뿐이다.
한국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투표 결과도 자신이 지지한 후보나 당이 패배한 경우에는 승복하지 않는다. 법원의 판결도 자신이 바라던 것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투표 결과는 부정선거 때문이고 내가 원했던 것과 다른 판결은 판사가 편파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표결, 판결과는 무관하게 내가 믿는 '진실'은 따로 있다. 해결책은 어떻게 해서든 정권을 교체해서 부정선거를 저지른 세력과 편파적인 판정을 한 사법제도를 '청산'하는 것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복수의 도구에 불과하다.정치의 선결 조건은 '공적 영역'의 발달이다. 복수는 개인이나 집안, 씨족, 학파, 당파 등의 단위에서 작동하는 규범이다.
경제는 개인과 가족, 기업이 먹고사는 문제다. 다시 말해서 복수와 경제는 모두 '사적 영역'의 문제들이다. 반면 정치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사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적 영역'이라 불리는 '공동체'와 '국가'의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공화'(共和)와 '공영'(公營, commonwealth)을 추구하는 행위다.
정치는 공적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민주주의를 통하여 시민 모두의 정치 참여가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참여가 공적 영역의 형성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민주주의는 포장에 불과하다. 한국에는 성숙한 '공적 영역'이 없다. 정당이고 정치인이고 '공동체'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누르고 사적인 이해관계를 희생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에 대한 환멸과 냉소주의, 무관심이 점차 심화되고 있는 것도 '정치'의 이름으로 권력 투쟁, 정쟁, 권모술수, 중상모략, 정치 공학을 통한 복수만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라와 공동체의 '공익'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개인, 집안, 지역, 파벌, 정당의 '사익'만을 취하고자 적나라한 투쟁을 전개한다. 민주주의가 복수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공적 영역이 부재한 한국에 정치가 설 자리는 없다.
정치가 없으니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해결이 불가능하다. 한국은 이념 갈등, 빈부 갈등, 노사 갈등, 세대 갈등, 종교 갈등, 남녀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다. 국가 정통성 문제, 5·16과 5·18, 천안함과 세월호, 과거사와 역사 교과서 문제 등 국가의 정체성, 국기의 문제로 분열되어 반목하고 있다. 정쟁과 복수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다. '진영 논리'에 입각하여 정권 교체를 하여 아무리 '개혁'을 하고 '청산'을 하여도 풀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보상으로도 풀어지지 않는 갈등들이다. '공적 영역'에서 '정치'를 통해서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정치는 어렵다. 개념도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정치를 제대로 하고 있는 나라가 한 손에 손꼽을 정도로 적은 이유다. '정치'란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다. 경제가 발전하여 물질적인 조건이 충족된다면 저절로 열리는 새로운 단계가 아니다. 인류가 진화하고 사회가 발전하면 응당 도달하게 되는 역사의 종착점도 아니다.
'정치'는 인류의 절대다수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전제주의나 가부장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제도,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세계관과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함양하고 실천할 수 있을 때만 만들어지고 유지할 수 있는 지극히 '인위적'인 체제다. 정치는 만들기도, 실천하기도, 지속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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