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김수용] 희망(希望)

김수용 논설실장
김수용 논설실장

희망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단어로 여겨진다. 국어사전에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풀이돼 있다. 소소한 일상부터 공동체, 국가, 세계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다. 그러나 희망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가 제우스에게 선물받은 상자를 열자 질병, 슬픔, 가난, 전쟁, 증오 등이 쏟아져 나왔고, 마지막에 희망이 남았다. 이를 두고 흔히 인류가 갖은 역경을 딛고 결국 행복을 쟁취한다는 키워드로 희망을 언급하지만 지극한 불행 가운데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을 바란다는 비관적 의미도 담고 있다. 희망의 본질 중 하나는 실현 시간의 불명확이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 고문'일지 모른다.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는 '장래 희망'을 강요받았다. 당차게 답하는 어린이는 될성부른 나무이고, 머뭇거리면 노란 싹수 취급을 받았다. 현재 젊은이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뭐라고 답을 할까. 희망은 성취를 위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더 나은 삶을 꿈꾸라고 윽박지르지만 노력이 반드시 후한 결과물을 가져온다는 담보도 없다. 철학자들은 희망의 이중성을 간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쓸데없는 환상 탓에 현실 감각을 해친다며 '깨어 있는 사람의 공상(空想)'으로 불렀고, 스피노자는 희망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두려움과 슬픔을 가져오기 때문에 희망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희망은 비관주의의 산물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희망을 놓칠 수 없다. 막연한 기대와 바람이 아니라 처절한 현실 인식에서 오는 몸부림, 삶의 밑바닥에서 차고 올라가려는 굳은 의지가 희망이어서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루아와 저널리스트 모니크 아틀랑은 저서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에서 "희망을 포기하고 버리려는 태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책이 출간된 2016년 방한한 저자들은 한국의 독특한 정서인 한(恨)과 희망이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둘 다 원하는 바를 실현하고픈 열망에서 출발한 만큼 슬픔의 한에서 기쁨의 희망으로 이동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2025년을 희망해야 한다. 척박(瘠薄)한 현실을 깨부수려는 불굴의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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