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솔직한, 너무나도 도발적이게 솔직한

[책] 쓰는 생각 사는 핑계
이소호 지음 / 민음사 펴냄

[책] 쓰는 생각 사는 핑계
[책] 쓰는 생각 사는 핑계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려면 명품을 할부로 사서 갚으면 된다."는 명언이 있다. 돈이 필요하면 일을 하기 마련이고, 일을 해야만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자본주의적 삶의 기본 중 기본이다. 하물며 물신주의에 푹 빠진 쇼퍼홀릭임에랴.

심각한 건강염려증 때문에 매일 백화점 산책을 하는 사람. 사고 싶은 게 있을 때 글을 쓰고 글은 돈이 된다는 명랑한, 아니 맹랑한 진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시인. 이소호의 산문 쓰는 '쓰는 생각 사는 핑계'는 제목부터 중의적이다. 처음에는 생각을 글로 옮기는 삶에 대한 핑계일까 라고 넘겨짚지만 2쪽도 못돼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니까 소비할 생각과 쇼핑하는 핑계 사이에 글이 있는데, 돈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글이 만들어지며 그렇게 획득한 돈으로 물건 사는 핑계를 완성시킨다는 얘기다.

그건 그렇고, 소위 시인이라는 사람의 산문이 처음부터 쇼핑중독 이야기고 날것의 단어조합으로 가득하다. 솔직하다 못해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드는 표현은 작가가 선택한 말의 기원, 즉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고스란히 대변하면서 현실감 넘치는 세계로 유인한다. 예컨대 "한 권 한 권 어느 것 하나 진실에서 시작한 책이 없다. 전부 방금 이 침묵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거대한 거짓말이었을 뿐.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는 그 거짓말을 수습해 진짜로 만들었다."(48쪽) 거나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떤 힘으로 시를 쓰고 있냐고. 간단하다. 셈을 바꾸면 된다. 이렇게 손가락이 한순간도 쉬지 못할 정도로 40매 정도는 써야 향수를 살 수 있다."(123쪽) 거나,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순간에 시가 되었다면서 "그냥 마음이 닿아서 그냥 그렇게 쓰였다고. 실은 아무 이유는 없다고."(140쪽) 말하는 식이다.

이소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 옛날 페르시아에서 태어났다면 셰에라자드 자리를 대신하고 남을 정도다. 말을 지어내고 지어낸 말로 물건을 사고 그 물건에 다시 말을 얹는 반복행위. 작가 스스로 밝히듯이 그 재미로 물건을 사람. 그러니까 물건을 사고 그 물건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 설득시키고 그것을 가끔 문학적 자양분으로 쓰는 탁월하고 신선한 재능을 가졌다.

책의 핵심은 3부 '이어질 이야기'. 단추 하나를 사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치며 동의할 만하고, 아니더라도 고개를 주억거릴 터다. "단추 가방에서 프랑스 여자를, 뭄바이에 사는 인도 소녀를 떠올렸다."(181쪽)가 가방을 들고 산보를 나가 콜드브루 벤티 사이즈를 마시는 시인이라니.

'쓰는 생각 사는 핑계'는 가벼워보여도 천박하지 않고, 거친 표현조차 우악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휘발성 강한 언어유희라는 말로 서둘러 단정하기엔 작가의 문학적 자산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매 꼭지마다 자신의 일상과 문학을 연결한 다음 꼭지 마지막에 '쓰다가 한 생각'이라는 추신 격의 글을 붙이는데, 이를테면 대놓고 하지 못한 말을 시침 뚝 떼고 슬그머니 끼워 넣는 형식이 흥미롭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어떤 시인이 되고 싶냐는 물음에 "엄마가 오래오래 보관하다 딸에게 대대로 물려주며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나보다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샤넬 클래식 미디엄 백을 생각했다."고 대답하는 이소호. 그렇게 여러 사람 손에서 오래오래 읽히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사물을 빗대어 삶을 통찰하고 그렇게 생산한 글로 돈을 벌어 물건을 사는 작가의 10년 뒤 작품도 궁금해진다. 아니 그의 단편 소설집부터 찾아봐야겠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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