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황희진] 벙커 안 대통령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벙커(Bunker)는 보통 방공호(防空壕)를 가리킨다. 사람, 물자, 장비 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이런 방어 일변도가 좀 아쉬웠던지 방공호에 공격 기능도 갖춘 엄폐호나 되려 공격에 더 치중하는 토치카 같은 요새가 만들어졌다.

요즘 대통령 관저가 꼭 벙커 같다. 물론 계엄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 탄핵소추로 직무 정지된 대통령이 관저에 틀어박혀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에 대한 방어 전략을 짜는 건 법이 보장하는 행동임이 분명하다. 방공호까지는 인정.

하지만 새해 첫날 공개된 한 장의 편지가 대통령 관저를 방공호 수준이 아닌 요새로 보게끔 만들었다.

대통령은 관저 앞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자 모인 지지자들에게 친필 서명이 담긴 편지를 보내 "저는 실시간 생중계 유튜브를 통해 여러분께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독려했다. 편지에서는 "추운 날씨에 건강 상하시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된다"면서도 "우리 더 힘을 내자"며 '지지자들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싸우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집회 유지를 독려하는 뉘앙스를 보였다.

불현듯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후 계엄군을 지휘했다는 용산 지하 벙커가 떠올랐다. 거기서 계엄군 주요 지휘관들에게 전화로 상황을 묻고 보고를 받으며 지휘 감독을 했다는 당시 계엄 투입 장군들의 증언이 떠올랐다. 혹여 벙커를 이제는 관저로 옮겨 그 앞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비슷한 행동을 취한 건 아닐까. 의도가 도대체 뭔지는 대통령이 입을 열어야 알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벙커에서 현장을 움직이려는' 구도와 중심에 '나'를 두는 맥락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역사 속 벙커 이야기의 한 챕터를 국가 수장들의 벙커가 차지한다. 그런데 대부분 독재국가 수장들의 사례다. 이라크와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후세인과 카다피를 얘기할 땐 관저 지하의 대형 벙커가 따라붙는다. 물론 그들은 결국 벙커 덕 못 보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빼놓을 수 없는 게 나치 독일의 독재자였던 히틀러의 퓌러붕커(총통 벙커)다. 2차대전 패색이 짙어지자 베를린 한복판에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연인 에바 브라운과 독일 패망 직전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함께 생도 마감했다.

이런 비극의 재현을 대다수 국민은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국민들은 지난 계엄 선포 때 계엄군이 5·18이나 12·12 같은 결과를 만들까 우려했고, 대통령의 '끝까지 싸우겠다. 우리 더 힘내자'는 편지를 두곤 자칫 관저 밖 물리적 충돌을 유도한 건지 우려한다. 비극이 발생할 가능성은 계속 벙커 밖 사람들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

여당조차 에둘러 우려했다. 신동욱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대통령 체포영장과 관련해 2일 언론에 "많은 국민이 법 집행기관과 시민 사이 (체포영장 집행과 관련한) 충돌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많은 분이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해 주길 바란다"고 했고, 이에 대통령 입장문(1일 공개 편지)도 자제의 대상인지 묻자 편지 원문을 그대로 해석해 달라고 말을 아끼면서도 "사회가 극단적인 양 진영으로 갈려 물리적 충돌까지 우려하는 상황은 최대한 자제되는 게 맞다"고 했다.

계엄에 대한 법적 평가가 남았고 탄핵 심판 결과도 나오기 전이다. 아직은 갑론을박의 문제다. 그런데 대통령이 벙커에서 사회 분열을 조장 내지는 방관하는 모양새는 수많은 국민은 물론 여당도 지적하는 부분이다. 이 벙커는 현재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의 '수사기관 출석 거부'와 '체포영장 불복' 사례가 작성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법치주의와 싸우는 벙커가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자리하는 게 말이 되나. 이걸 재판 중 야당 대표 등 다른 정치인도 따라 하면 어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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