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함께 꿈꾸는 시] 서영처 '건기'

2003년 '문학/판'으로 등단, 現 계명대학교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시집 '피아노 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악기들이 밀려오는 해변'

서영처
서영처 '건기' 관련 이미지

〈건기〉

숲속엔 비껴드는 햇살

구름이 흘러가고

낚시꾼이 거울을 깨고 못의 아가미를 낚아 올린다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에서 북북서로 방향을 틀면

차일 아래 관계 증진을 위한

거짓말쟁이협회 회원들의 정기총회가 열리고

박수 소리 들려오고

불행이라곤 모른 채 머리를 맞대고

오순도순 잠드는 무덤들

적막한 꿈속으로 베일을 쓴 여인이 지나간다

네게로 가는 길목에 파놓은 여덟 개의 구덩이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구덩이 앞에서 발을 구르면

어둠에 방치된 이야기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나온다

이곳을 배회하다 추락한

구출을 원치 않는 자의 신음 소리를 듣기도 한다

구덩이에 뿌리 내린 나무들이 사람의 말을 흉내 낸다

이 구덩이를 극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몇 달째 비가 내리지 않은 곳

매운 먼지 냄새

균열이 생긴 리코더가 쪼개진다

서영처 시인
서영처 시인

<시작 노트>

건기

여덟 개의 구덩이는 피리의 여덟 개 구멍이다.

건기는 여덟 개의 구멍 속에 숨겨진 숲과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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