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의 동선합섬(주) 현관 앞에는 이 회사 서석홍 회장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설치돼 방문객을 반긴다. 기념 동판에는 동선합섬이 1973년 창립됐다는 사실과 서 회장이 국내 최초로 지퍼용 모노사와 산업용 PP(폴리프로필렌)사를 개발했다는 공적이 기록돼 있다. 회사 내부 곳곳에 비치된 수많은 상패와 기념 사진은 50년 섬유 산업 외길을 성실히 걸어온 서 회장의 뚝심있는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경북 고령 출신으로 영남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동선합섬을 설립, 원사 소재 국산화에 성공하는 등 중견기업으로 일구면서 국내 PP업계 성장을 견인했다.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과 경기도 상공회의소연합회장을 역임하는 등 경제계 대표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재경 영남대총동창회장을 역임하고 모교 출신인들의 골프 모임인 '영지회'에 열심인 그는 후배 사랑에도 아낌이 없다.
- 경북 고령 출신으로 영남대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하셨다.
▶중농(中農)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기술을 배운다고 대구의 양복점 보조원으로 잠시 일했지만 이내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약방 점원으로 2년 더 일했어요. 당시 시골에선 '어설프게 고등학교 나와서는 반거지 된다'는 얘기가 돌 때였죠. 하지만, 학업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고 다행히 경북공고 방직과 2학년으로 늦깍이 편입해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대구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섬유도시라 방직과를 선택했는데, 이후 평생을 섬유업에 종사했으니 운명이라 할만하지요.
남들보다 고교 입학이 늦었지만 학업에 매진한 결과 졸업식 때는 대표로 답사를 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1963년 한국나이롱에 입사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나일론 산업의 불모지인지라 입사 기준이 까다로웠고 전국 공고 졸업생 중에도 성적이 우수한 사람에게만 지원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입사 후에는 섬유를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청구대(현 영남대) 야간 섬유공학과에 입학해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 1973년에 동선합섬을 창업하시게 된 계기는?
▶4년 넘게 일한 한국나이롱을 나와서는 채용 공고를 보고 서울 영등포의 '삼덕무역'이라는 섬유회사에 지원해 합격했습니다. 입사해보니 원사를 뽑는 기계가 이탈리아제였는데 자주 고장이 나서 생산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기계 탓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야전 침대를 공장 한 구석에 갖다놓고 하루 종일 기계에 매달렸고 몇 주 만에 원사를 쑥쑥 뽑아 내며 정상 작동됐습니다. 이후 주임에서 과장으로, 부장으로 승진했고 스물아홉살에 공장장으로 초고속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삼덕무역이 갑자기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충남방적으로 인수가 됐고 임원급 공장장을 그대로 받아줄리 없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어요. 사표를 낼 때까지 고민도 있었지마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아울러 '어떤 이가 나일론 모노사로 지퍼용 원사를 만들어서 크게 성공했다.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지인의 권유도 계기가 됐습니다. 잘 아는 분야에서 창업을 이루면 얼마나 보람찰까 가슴도 설렜습니다.
- 섬유산업 외길로 50년을 걸으셨습니다.
▶동선합섬 창립 당시만 해도 플라스틱 지퍼 소재인 원사(모노필라멘트)를 국내에서 만들지 못해서 독일, 일본에서 수입해서 썼습니다. 그걸 우리 회사가 처음으로 국산화시킨 거죠. 품질 좋고 가격 경쟁력까지 있으니 더 이상 수입할 필요가 없게 됐죠. 제조업이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걸 몸소 겪으면서 기업의 역할을 깨달았습니다. 현재까지도 국내 플라스틱 지퍼용 원사의 99%를 우리 회사가 생산하고 있어요.
모노필라멘트 국산화 이후 PP사업에서 새로운 도전을 했습니다. PP는 포장용 필름, 테이프, 의류, 완구, 일용잡화 등 그 용도가 매우 다양해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는 섬유산업 성장기였어요. 1978년 본격적으로 뛰어든 PP분야는 대성공을 거뒀고, 우리나라 최초로 PP를 홍콩, 인도네시아, 대만 등 동남아 각국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각국에서 밀려드는 주문량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PP사업은 번창했습니다. 연이은 해외시장 개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무역의 날에 정부로부터 2천만불 수출탑과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현재도 동선합섬은 해외 50여개 국 이상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 섬유 산업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전격 수교를 맺자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중국의 저가 제품들이 우리나라로 대거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섬유산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회사와 거래하던 국내 업체들이 하나둘 값싼 중국산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동남아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도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해 가격을 낮추려 했지만 반값도 안되는 중국산과 가격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1993년 중국산 공세에 매출이 반토막 나면서 엄청난 부채까지 안았습니다. 뼈를 깎는 각오로 감축 경영에 나섰습니다. 생살을 베어내는 심정으로 일부 공장들과 사옥, 설비를 매각하자 자금 순환에 숨통이 틔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임직원들을 떠나보낼 때는 이를 악물로 눈물을 참았어요. 그 후로도 숱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후 제2의 창업 각오로 제품 연구개발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산업자재용 섬유인 PP고강력사 시장도 다시 개척했고, 안전망용 고강력사 분야에서도 최고 수준에 올랐습니다. 건축인테리어용 섬유사, 불에 타지 않는 난연사, 벨크로용 모노사 등을 통해 다시 매출을 일으켰습니다.
아울러 제품 연구개발과 생산 설비 확충, 생산·관리·영업·무역 단일화로 경영혁신을 일궈내고자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직원이라는 신념으로, 노사화합을 잘 이끌어내고자 힘을 쏟았습니다.
- 모교인 영남대와 고향 사랑도 열정적이십니다.
▶한국나이롱 현장 근무를 하면서 고단함 속에 모교인 영남대를 졸업했습니다. 주경야독을 이어가야 했기에 졸업 때 그 보람은 더욱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그 덕분에 배움의 길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 경영대학원, 서울대 경영대학원, 고려대 국제대학원 등에서 경영자로서의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2003년에는 모범 영대인상, 2011년에는 자랑스러운 영대인상, 2015년에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모교는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마음 속 고향 같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인 고령은 예를 중시하고 풍류를 즐기는 멋을 아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재경 고령군 향우회장(2012년)에 취임해 수도권 지역 고령 출신 인사들 간 교류를 이어주고자 노력한 게 큰 보람이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꾸준히 공부하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도 하루에 10여종 신문들을 이동하는 승용차 안에서 읽고 있습니다. 신문에서 AI, 반도체 등 뉴스를 접하면서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일단 도전해보라는 당부도 꼭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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