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주민들인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문화
개인은 물론이지만 국가나 민족에게는 '정체성'이 매우 중요하다. 자기 존재의 근본과 원형을 아는 도구이며, 가치를 찾고 역할을 실천하는 방법론이다. 또한 구성원들에게 '자유의지'와 '자긍심'을 채워준다. 우리는 오랫동안 스스로 또는 다른 국가(중국, 일본 등)에 의해 정체성이 약화되거나 왜곡됐었다. 지금은 정체성에 관심이 많고, 자기 주장들을 한다. 정체성이란 '어떤 사람들이, 어디서, 언제부터 생성됐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아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선 출발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아프리카를 출발한 전기 구석기인인 호모 에렉투스(직립원인)는 최소한 150만여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동아시아 지역에 도착했다. 이어 네안데르탈인도 도착했고,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들도 동아시아와 만주,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도착해서 채집하고, 강가나 바닷가에서 어렵을 하고, 숲과 산에서 수렵을 하면서 살았다. 그 기간 동안에 진화하면서 생물학적으로 변화가 있었다.
구석기 유적들은 만주의 요하 지역에 20여 곳이 있는데, 대표적인 금우산 유적은 약 28만년 전 유적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 수계에는 10여 군데의 유적들이 있는데, 10만년 전에서 3만년 전 사이의 길림시의 선인동 유적이 대표적이고, 부여인의 발상지인 1만1천년 전후한 치치하얼의 앙앙계 유적이 있다. 역시 연해주와 우수리강 유역에는 1만3천년 전을 전후한 시기의 소남산 유적이 최근에 주목을 받는 중이다.
한반도에도 약 100여 개의 구석기 유적들이 강, 바닷가, 동굴 유적(강과 가까운) 등에서 발견됐다. 북한에서는 30여 곳 이상이 조사됐다. 평양 근처의 검은모루 동굴은 약 60만~40만년 전의 유적으로 호모 에렉투스가 거주했고, 알려진 덕천의 승리산인은 10만년에서 4만년 전 사이에 살았다. 북한 학자들은 평양시 근처의 주민인 만달 사람이 한민족과 가깝다고 주장한다. 주체사관으로 만든 '대동강 문화권'의 영향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동해안인 함경북도 굴포리에서도 10여만년 전, 4만년 전 후의 유적이 발견됐다.
남한도 마찬가지였다. 공주의 석장리 유적은 3만년 전의 것인데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다. 한탄강가인 연천의 전곡리에서는 20만년 전의 유적이 발견됐는데, 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됐다. 경기도의 고양 지역 등에서는 6만년 전의 구석기 유적들, 제천의 점말동굴, 단양의 70만년 전의 금굴 유적과 수양개 유적이 있다. 청원군의 두루붕 동굴에서는 '흥수아이'로 명명된 약 4만년 전의 호모사피엔스의 인골이 발견됐다. 동해안도 정동진 일대를 비롯한 강릉 일대의 여러 지역과 내륙지역에서도 구석기인들이 살았고, 제주도는 빌레못 동굴에서 6만5천~3만5천년 전의 구석기인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처럼 남만주와 한반도에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으며, 후기에 살았던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유사한 자연환경 속에서 몇 만 년을 함께 살면서 생물학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졌을 것이다. 다만 이들이 인종 인류학적으로 한국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북한은 후기 구석기인인 만달사람이 현재 한민족과 혈연적으로 연관됐다는 주장을 한다.
◆신석기 문화, 한민족 문화의 첫 원핵이 만들어지다
대략 1만2천여년 전을 전후한 시기에 지구는 간빙기에 접어들어 따뜻한 충적세가 되었다. 인류는 '신석기 혁명'으로 부를 정도로 문화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숲과 들, 강가와 바다에서 효율적인 돌무기와 도구들, 토기를 본격적으로 만들고, 시간의 차이를 두고 농경을 시작했다. 한 곳에 거주하여 가족과 마을을 만들고 자기들 만의 무리를 이루었다. 또한 이동할 수 있는 능력들이 발달하면서 식량을 구하기 좋고, 주거환경이 편하고, 특히 농사짓기에 유리한 터전을 찾아 이동했다.
그런데 남만주와 한반도 지역은 신석기 시대에 적합한 생태환경을 갖췄다. 조건에 따라서 각각 여러 지역에 정착하여 생태환경에 적합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문화를 만들었다. 이들은 발달된 돌 창, 뿔로 만든 창과 칼 등을 사용해 큰 동물을 잡고, 본격적인 어렵을 시작해 그물로 사용한 어망추, 작살, 낚시바늘까지 등을 발명했다. 점차로 일부 지역부터 벼농사를 시작했으며 후기 구석기 시대보다 더 범위를 넓혀 원거리 상업도 했다.
약 7천년 전부터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오고 갔다. 홍해에서는 이미 7만년 전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를 항해했다. 이렇게 해서 몇 몇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방식와 기술력, 신앙 등에서 '생활권'이 만들어지고, 고유한 '문화권'이 만들어졌다.
◆만주 일대의 신석기 문화
요서 지역에서는 8천년 전에 흥륭와 문화 시기에 농사가 시작됐고, 수렵, 목축과 함께 어렵도 시작했다. 동북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연관된 '之'형의 빗살무늬 토기들을 만들었고, 신앙시설도 만들었다. 이어 5천년 전 무렵에 등장한 홍산문화는 각종 산업이 발달했고, 경제력도 풍부해서 옥기 같은 예술품 등의 문화가 뛰어났으며, 정치제제를 갖춘 '도시'(古國)도 만들어졌다. 엄청난 크기의 수 많은 무덤들과 거대한 신전, 제단터 등이을 발굴했는데, 우하량(牛河粱)의 거대한 적석총들은 약 5천500년 전 무렵에 만들어졌다. 홍산문화는 우리와도 직접, 간접으로 연결된 동아시아 '母'문명인 '요하문명'의 핵심으로서 의미가 크다.
요동 지역에서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심양 지역에서 6천800년 전을 전후한 시기의 신락 유적이, 신민현에서는 고대산 유적이 발굴됐다. 이들은 농경을 하고, 채집과 어렵도 함께 한 전형적인 신석기 문화였다. 요동반도 남쪽에는 산동 지역과 발해로 연결된 소주산 문화가 발달했다. 돌과 뼈로 만든 각종 도구와 비녀, 돌과 흙으로 만든 구슬, 조개 팔찌 등의 장신구들이 발견됐다. 집돼지, 꽃사슴, 너구리 등의 동물과 각종 소라와 물고기, 멍게 등의 유물이 발견됐다. 중만주는 산과 강이 많고 추위가 심한 생태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힘들고, 농사짓기에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부여의 발상지인 송화강 중류 지역과 눈강의 중류에서 역시 신석기 문화가 발전했다.
동해와 맞닿은 연해주 일대도 농경은 발달하지 않았지만, 숲과 들판, 큰 강들에서 식량을 채집하고, 바다에서 어업도 했다. 이 문화는 약 1만년 이전부터 동해의 바닷가를 걸어서 또는 배를 타고 연안항해를 하면서 남쪽으로 전래됐다. 두만강 하구 북쪽 근처인 보이스만에는 약 6천년 전에서 5천년 전 사이의 문화가 발달했는데, 함경북도 나진 및 서포항 유적과 관련성이 깊다.
이렇게 남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고, 훗날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우리 민족 최초의 정치체인 조선이 활동한 공간이었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
한반도의 여러 지역도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는데 만주 일대 등과 연관이 깊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달한 미송리 문화는 번개무늬의 토기들과 농사에 사용한 반달돌칼 등과 예술품들을 만들었다.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 강원도의 고성 문암리와 양양 오산리 유적, 울산의 서생포 유적, 제주도의 고산리 유적 등은 연해주 일대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 덧무늬토기(8천년~6천년 전), 빗살무늬 토기, 무문토기들, 흑요석들이 전해졌고, 낚시바늘들은 일본열도와 연결된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들 등 신석기 문화의 유적들이 발견되는데, 평안남도 궁산유적은 약 6천년 전의 집터들과 토기, 무기, 농기구들, 대구 등의 생선뼈도 발견됐다. 홍산문화와 연결된 부분도 있는데, 북한학계는 다른 지역의 유적 유물과 구별되고, 고유한 모습이 있다고 주장한다. 황해도 봉산의 지탑리 유적은 집터에서 조, 피 등의 곡식들이 발견됐다. 길고 광범위한 한강 하계망과 경기만은 신석기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강화, 김포, 고양, 일산 등은 벼농사가 시작된 지역이고, 빗살무늬 토기들이 많이 발견됐다.
남한강 유역에서는 서기 전 1만년경 부터 단립벼를 재배했고, 충주시 조동리 유적에서는 약 6천200년경의 단립벼 탄화미가 밀·보리·수수·기장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 서해 남부의 부안 등 군산권과 전라남도의 해안에서 토기 등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패총들이 발견됐다.
울산과 부산 등의 남해 동부에는 일본열도에서 토기, 흑요석 제품 등의 조오몽(繩文) 문화가 전해졌다. 상대적으로 약 6천500년 전후의 우리의 덧무늬 토기 등이 대마도에서 발견됐고, 약 5천년 전 전후의 빗살무늬 토기들이 대마도와 큐슈 등의 소바다식 토기에 영향을 끼쳤다. 대한해협의 해류, 조류, 계절풍, 항해 거리 등을 고려하면 가능하다. 필자는 이러한 설을 제기하고 입증할 목적으로 1983년에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 해안을 출항해 42시간 만에 대마도의 북부해안에 상륙했고, 이어 큐수 서부해역까지 항해했다. 이렇게 한반도에서도 전국적으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다. 하지만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만주와 연해주의 여러 지역, 일본열도로부터 문화가 전달됐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 남만주와 한반도는 공동의 '생활권'·'문화권'
현재의 우리의 정체성을 재발견과 확립하는데는 최초의 원핵인 신석기 문화의 양상과 메카니즘을 이해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신석기 시대에 남만주 일대와 연해주, 한반도는 전체적으로는 유사한 생태환경이지만 지역마다 약간씩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필자가 설정한 동아지중해라는 틀에서 보면 요서와 요동 지역, 압록강·대동강·한강·두만강·금강·섬진강·낙동강 등 큰 강의 하구들과 경기만, 서남 해안, 연해주 일대, 동해안, 남해안 등은 간빙기로 인해 생겨난 해안가와 해양을 공유하였다. 때문에 주민들은 상업과 문화교류, 주민의 이동은 주로 해안가와 바다를 이용해서 활발했다. 대부분의 내륙 지역은 강의 하계망을 활용하여 직접, 간접으로 교류가 있었다. 다만 송화강 유역 등 만주의 내륙 지역과 백두대간의 산골은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거기다가 이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오늘날의 '종족'이나 '민족'처럼 생물학적인 차이나 정치적인 성격 차이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와 남만주를 느슨한 체계의 '공동의 생활권' 개념으로 설정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 남만주와 한반도는 여러 지역에서 한민족의 소원핵들이 만들어지면서 역사가 태동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정치력에 근거해 국가와 종족의 구분이 생기고, 만주의 일부 지역은 우리 문화권과 역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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