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가는 인구 동포의 수가 많은 것은 좋은 것이나 한편 걱정되는 바 없는 것도 아니다. 여하든 우리 동포가 그 누구나 좋은 국가 이상을 가지고 씩씩하게 전진한다면 이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리오! 본사 조사에 의하면 우리 경북 도내 총인구수와 그 실정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구년 말 현재) 첫째, 대구 부내는 남자가 16만 7천 226명(약간 외국인도 포함) 여자가 16만 1천 명이 초과되어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월 4일 자)
인구가 늘면 박수 칠일이다. 그런데 걱정되고 한숨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자고 나면 텅 빈 쌀독에 전염병이 돌고 여름이면 물난리가 닥친다. 대구부 직업소개소에는 남루한 의복과 힘없는 눈으로 아침 일찍부터 문을 두드리는 남녀가 한둘이 아니다. 하루하루 생존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일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해방 이태 뒤에 경북도의 실업자는 16만을 돌파했다. 그러니 인구가 느는 만큼 걱정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해 대구 인구는 32만 8천여 명으로 집계됐다. 남자가 여자보다 6천 명이 많았다. 대구 같은 큰 도시는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들이 많아졌다.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든 때문이었다. 한 달 만에 200여 명의 여성 구직자가 몰릴 정도였다. 여기에는 공장의 여공부터 식모, 식당이나 유흥업소의 종업원 등도 포함됐다. 일제강점기에도 도시에는 여자들이 많았다. 1939년 조사에도 도시에는 여자 100명당 남자 99명인데 비해 군 지역은 103명이었다.
해방 3년째인 1948년 경북도 전체인구는 2백26만 명에 이르렀다. 군 지역에서는 경주군이 21만 7천 명으로 인구가 가장 많았다. 영일군과 안동군이 각각 20만 7천여 명, 18만 6천여 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울릉도는 1만 2천 명으로 가장 적었다. 직업은 농민이 110만 명으로 절반에 육박했다. 수산업이 20만 명이었고 상업(7만 6천 명)과 자유업(5만 2천 명) 순이었다. 직업이 있는 사람은 15만 명, 실업자는 16만 명이 넘었다. 대구부의 실업자는 전체인구의 16%인 5만 2천여 명이었고 직업이 없는 사람을 합친 무업자는 절반인 17만 명에 달했다.
당시는 인구조사가 쉽지 않았다. 행정체계도 허술했거니와 전재민이나 이재 동포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토막민도 적지 않았다. 대구의 인구가 30만 또는 36만이니, 40만이라는 이야기가 나돈 이유였다. 같은 해 9월 대구부의 총인구는 33만 7천여 명이었다. 이는 쌀 배급 통장과 호적대장을 조사해 얻은 비교적 정확한 숫자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의 26만 9천 명에 비해 6만 7천여 명이 늘었다.
전재 동포의 유입 외에도 출생아가 늘면서 인구는 해마다 꾸준히 늘었다. 하지만 경북의 인구가 줄어든 시기도 있었다. 1936년에는 경북도 인구가 1만 4천여 명 감소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1934년 삼남(경상도‧전라도‧충청도) 대수해 이후 만주 이민을 강제한 탓이었다. 이재민 구제와 인구과잉 해소를 명분 삼았지만 누가 봐도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만일여(鮮滿一如)를 실현하려 한 식민 통치의 일환이었다. 1937년 8월에는 경북 이민 노동협회를 설립해 1천여 명의 경북도 빈궁 민중을 같은 이유로 강제이민 시켰다.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다 같이 느끼는 문제지만 우리 대구로서는 더욱 중대한 문제이다. 금년 4월부터 직업소개소와 경북후생회에서 알선한 것이 겨우 공장에 600명과 대구종합운동장 만드는데 2천 명의 노동자를 알선하였을 뿐으로 그 외에는 별도리가 없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0월 7일 자)
경북도의 실업자 급증과 함께 대구부 역시 인구 증가에 따른 일자리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공장에 600명을 취업시키고 대구종합운동장 공사에 2천 명의 노동자를 투입한 것이 전부였다. 수해 예방을 위한 대구천 제방 공사에 몇천 명의 신규일자리를 기대하는 정도였다. 당국은 유입 인구뿐만 아니라 출생아 증가도 불안해했다. 당장 입에 풀칠도 못 할 판에 미래세대를 위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인구 증가에 대한 한숨은 빈곤 탈출이 더뎌진다는 우려와 맞닿아 있었다. 그래도 인구는 늘었고 되레 가난 탈출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9년 만에 전국의 출생아 수가 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비정상의 리더로 인해 국민이 절망하고 살림이 무너져도 그럴까. 새해 소원처럼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박창원(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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