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책]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책] 필경사 바틀비
[책] 필경사 바틀비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시중에 나온 허먼 멜빌의 단편집 중에서도 '문학동네' 판을 선택한 건, 바틀비의 공허한 무표정을 거친 붓질로 묘사한 하비에르 사발라가 그린 표지에 마음을 뺏겼기 때문이다.

'모비 딕', '빌리 버드'와 함께 허먼 멜빌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필경사 바틀비'는 1855년 11월과 12월 뉴욕 '퍼트넘스 먼슬리 매거진'에 실려 호평 받은 후 이듬해 단행본으로 엮어진 작품이다. 단편임에도 다양한 함의와 해석이 담겨 있고, 철학적 논의에 동원되는 독특하고 묘한 매력을 지닌 이 작품은 2001년 조너선 파커 감독의 '바틀비'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필사를 하고 글자 수대로 돈을 받던 직업이 '필경사'인데, 책 속 바틀비의 삶과 저자 멜빌의 인생이 겹쳐진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캐릭터 무비를 보는 듯한 책의 시작은 초로에 접어든 야망 없는 변호사와 그의 일을 돕는 일원들에 대한 소개이다. 예순 살 언저리의 뚱뚱한 영국인 터키는 "정오가 되기 전까지 가장 빠르고 착실한 친구"이고, 스물다섯 살의 니퍼스는 필사는 빠르고 깔끔하면서 "마음만 내키면 흠잡을 데 없는 신사처럼 행동"하는 청년이며, 마부의 아들로 열두 살인 진저 너트는 두 사람의 과자와 사과 조달을 맡은 심부름꾼이다. 그리고 주인공 바틀비가 등장한다.

이력도 과거도 배경도 모호한 사람. 화자는 바틀비의 안정성과 부단한 근면과 유흥을 즐기지 않는 점이 맘에 들었다고 술회한다. 또 침묵과 변함없는 몸가짐에서 귀중한 인물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바틀비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고 언제라도 그곳에 머무를 사람이었다(아니, 갈 곳이 없었다.). 제일 먼저 출근해 제일 늦게까지 남아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 여기까지만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필경사가 바틀비이다. 그러나 일한지 사흘 째 되는 날, 바틀비는 문서검증을 요구하는 변호사 말에 저항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때부터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표현으로 변호사의 요구를 번번이 묵살한다.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 아닌 이 말의 진의는 '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을 한다는 행위가 기정사실화 된 현실을 부정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와 관련해 조르주 아감벤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바틀비의 말은 '존재하거나 행동할 잠재성'과 '존재하지 않거나 행동하지 않을 잠재성' 사이에 있는 일종의 비무장 지대를 개방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주검같이 맥없고 침울한" 그는 유령처럼 "건물 여기저기에 출몰한다." 이처럼 전반에 걸쳐 죽음의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음에도 멜빌의 필력 앞에서 허무와 소외의 정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영화 '무산일기'의 전승철이 떠올랐다.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하는 탈북자 전승철의 현실은 법률사무소 한켠에 둥지를 튼 바틀비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

단편인 탓에 분량이 적은 게 아니라 단편으로도 충분한 멜빌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인 소설. 첫 장을 여는 순간, 바틀비가 거는 음울한 마법에 빠질 수밖에 없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 이불 푹 뒤집어쓰고 겨울밤을 밝혀 읽어도 좋을 묘한 마력의 책이 '필경사 바틀비'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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