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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 칼럼] 제왕적 대통령? 국회가 제왕이다

정경훈 논설주간
정경훈 논설주간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정치권에서 쏟아져 나온 구호다. 최순실(이후 최서원으로 개명) 국정 농단은 대통령에 무한 권력을 부여한 현행 헌법 때문이며 개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탄핵소추를 전후해서도 똑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와 한계가 재확인됐다며 대통령 권력을 축소·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 체제하에서 대통령이 연이어 탄핵소추됐으니 그럴듯하게 들린다.

과연 그럴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탄핵당하는 제왕도 있나? 제왕이 탄핵당한다면 그 자체로 제왕일 수 없고, 제왕을 탄핵하는 세력(1인이든 집단이든)이 진짜 제왕이 아닌가? 제왕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과 권한을 가진 지배자라는 뜻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함의(含意)가 그런 것이라면 윤 대통령은 계엄을 할 필요도 없었다. 계엄을 마음먹을 상황까지 몰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탄핵소추당할 일도 없고, 내란 수사권이 없는데도 공수처가 체포·수사하겠다고 날뛰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가 제왕인가. 대통령인가? 국회인가? 국회다. 국회는 대통령과 행정·사법 공직자들을 탄핵소추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어떤 이유로도 탄핵소추되지 않는다.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돼도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런 특권이 탄핵소추 남발을 낳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29건의 탄핵소추를 발의해 13건을 일방 통과시켰다. 그 대부분이 '직무 정지'를 노린 '정치 탄핵'이었다.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 검사 3명을 탄핵소추해 놓고 정작 헌재 탄핵 심판에는 국회 측 신청인인 정청래 법사위원장과 변호인 등이 '노쇼'한 것은 이를 잘 보여 줬다. 세계에서 이런 식의 탄핵소추를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반면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주지 않는다. 이로 인한 대통령의 국회 견제 기능 약화를 보완하는 장치는 기껏 법률안 재의요구권(거부권)뿐이다. 그러나 '야당 단독 법안 통과→대통령 거부권 행사→야당의 재발의' 도돌이표가 보여 줬듯이 재발의를 무한 반복할 수 있다. 또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는 엄격한 요건을 부과하면서 국회에는 '지체 없는' 계엄 해제 요구권을 줬다. 무엇보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대통령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수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인정했다. 그는 퇴임 후 4개월 만인 2008년 6월 지지자들 모임에서 "해 보니 대통령이 직접 챙길 수 있는 정책은 몇 가지가 안 된다. 국회를 상대로 따져도 막상 법안으로 올라오는 건 다른 방향으로 굽어져 간 일이 많았다"고 했다.

현행 헌법은 1987년 개헌의 산물이다. 개헌의 바탕에는 대통령 권력만 제한하면 독재나 권한 남용은 사라진다는 소망적 사고가 깔려 있었다. 민주당의 '의회 독재'는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착각(錯覺)이었는지 뼈아프게 말해 준다. 87년 개헌은 '제왕적 국회', 언론인 선배 배병휴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1인 헌법기관의 집합으로 집단적 제왕'이라는 새로운 괴물을 낳았다.

그런 점에서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개헌론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대통령 권력을 축소·분산하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대통령 권한 축소와 함께 국회 권한을 강화하자는 것도 있다. 한마디로 지금도 제왕인 국회를 더 힘센 제왕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21, 22대 국회를 거치면서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의회는 독재를 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근거 없는 맹신(盲信)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대통령과 국회의 건강한 견제와 균형이다. 그러자면 대통령 권한을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한 선결 과제를 꼽자면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부활이다. 국회해산권이 있었으면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그 자체로 윤 대통령은 계엄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협치를 위한 선거제도 개편이다. 박병석 전 국회의장은 퇴임하면서 "협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한 당도 전체 의석의 과반을 넘지 않게 선거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 소속인 자신이 보기에도 자당의 폭주가 얼마나 심했으면 이런 소리를 했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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