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2월 3일 대구 한 여중 입시 체능고사장. 전날 필답고사를 치른 6학년 수험생들이 오늘은 영하 2℃의 쌀쌀한 날씨에도 운동장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팔굽혀펴기 시험에 바득바득 용을 쓰는 아이, 차례를 기다리는 친구들, 운동장 멀리서 지켜보는 학부형 모두 초조하긴 매한가지. 이번 시험은 예년보다 쉽게 나와 체능고사에서 당락이 결정될 거란 소문에 운동장은 아침부터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중학 입시는 총 800점 만점. 국어·산수·사회·자연·반공도덕·음악·미술·실과 등 필답고사195문제에 780점. 체능고사는 달리기(60m), 넓이뛰기, 공던지기, 턱걸이(여자는 팔굽혀펴기) 등 4개 종목(각 5점 만점)에 20점. 이 가운데 팔굽혀펴기나 턱걸이는 한 개가 곧 1점을 갈라, 학생들은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았습니다.
앞서 2일 필답 시험날 수험생과 학부형들은 새벽밥을 지어먹고 오전 7시부터 시험장으로, 대구 시내 경찰은 싹 다 동원돼 이들의 수송을 도왔습니다. "엿처럼 잘 붙어라~." 수재들이 모인 경북중학교 앞에는 엿장수·떡장수가 40~50명이나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그 틈새로 중학생 언니 오빠들은 '불우소년을 돕자', '합격' 이라 쓴 엿 봉지를 흔들며 졸졸 학부형을 따라다녔습니다. 이윽고 시작종이 울리고 운동장을 서성이던 학부형들은 시험이 끝나도록 떠날 줄 몰랐습니다.
"내년부터는 과외를 묵인 하든가, 전면금지 하든가 해야 할 것…." 시험이 끝나자 공립학교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상부의 과외수업 억제정책을 따랐던 공립학교보다 학원출신 재수생과 국·사립학교에서 성적이 더 좋았기 때문. 공립학교 측은 "국·사립학교 학생들이 활개를 치며 과외를 한 때문"이라 성토했습니다. "정상교육 좀 먹는 과외를 전면 금지하고 학원을 폐쇄하라"는 강경론도 나왔지만 학부형들의 교육열은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1960년까지만 해도 학교별 시험문제를 냈던 중학 입시는 1961년부터 전국에서 같은 문제로 시험을 보는 국가고사로 전환됐습니다. 당시 일류 중학교 경쟁률은 평균 4대 1. 명문학교 진학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전국에 재수생이 2만명에 이르고, 가정교사를 두고 과외를 받는가 하면, 더 좋은 학교에 보내려 '치맛바람'도 생겨났습니다. 고작 중학교 입시인데도 합격자 발표날엔 명단이 신문 지상을 도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64년, 서울 한 중학교 입시에서 '무즙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엿을 만들때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을 묻은 문제에서 ①디아스타제 ②꿀 ③녹말 ④무즙 가운데 정답은 ①번. 하지만 일부 학부형들이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있다며 반발해 재판까지 간 끝에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되는 홍역을 치렀습니다.
1968년 대구에선 원서접수 마감(11월 20일)을 5시간 앞두고 점장이집에 우르르 학부형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학교 성적은?" "그 학교는 안돼." "거긴 틀림없어." 거침없는 예언에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아이들은 길거리에 철봉을 세우고는 번갈아 수험생, 채점관으로 예비시험까지 봤습니다. 그해 제일여중에서는 입학 정원과 지원자가 희한하게도 4백78명으로 똑같아 모두 무시험으로 합격하자, 지레 겁먹고 지원을 포기했던 교장과 학부형들은 무릎을 쳤습니다. (매일신문 1962년 12월 5일~1968년 12월 13일 자)
'무즙파동' 에 '입시지옥' 논란이 거세자 1968년 7월 문교부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1969년 서울에서 처음 실시되고, 다음 해엔 대구 등 10대 도시에서, 1971년부터는 전국 중학교에서 입시가 사라졌습니다. 시험대신 도입한 건 '진학 추첨제'. 물레 모양의 추첨기를 뺑뺑 돌리면 나오는 은행 알에 적힌 번호에 따라 진학할 학교가 결정됐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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