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이화섭] 명절이 걱정된다

이화섭 사회부 기자

이화섭 사회부 기자
이화섭 사회부 기자

곧 설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게 명절이라지만 올해 그려질 풍경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될 것 같다.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다 밥상이 엎어지고 머리채를 뜯는 풍경. 서로 이야기하기 껄끄러우니 그저 "잘 지내니?" 정도의 인사말만 건네고 조용히 이어폰 끼고 스마트폰만 보다가 서로 헤어지는 풍경. 대개의 속 시끄러운 상황은 후자의 상황을 깨 보려고 누군가가 말을 꺼내다가 결국 전자의 상황으로 간다.

어른들은 답답해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 아이들의 답은 간단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함'이 너무 불편한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고. 2030들이 명절이 괴롭다고 느끼는 이유는 중간관리자가 회사 생활을 힘들어하는 이유와 거의 비슷하다. 층층시하에 어른들은 많고, 어른들이 데려오는 애들은 나의 생활공간을 침범한다. 웃어줄래야 웃어줄 수가 없다

어른들은 섭섭해한다. 그래도 가족인데, 왜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구냐고. 아이들은 이렇게 맞받아친다. 평소에 연락할 일 없다가 명절 때나 보는데 정 쌓일 일이 있느냐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명절 세시풍속은 모두 농경시대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어차피 한 마을에 삼촌부터 팔촌까지 연결 안 된 사람이 없고 그 안에 있는 사람만 알아도 세상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다. 마을 안에서 일하며 부가가치를 만드는 농업과 달리 돈을 벌기 위해서 마을을 벗어나는 사람이 대다수다.(농촌에 살다가 도시로 이동하는 큰 '벗어남'부터 자신이 사는 아파트나 집에서 나와 자동차 혹은 대중교통을 타고 30분 안팎의 시간으로 출근하는 경우까지 모두 포함한다)

인간관계도 마을 안에 몇 명만 아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면으로 만나면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나는 직업도 있고, 저 멀리 외국의 누군가도 인터넷 등을 통해 만나는 시대다. 이미 이런 식의 설명조차 구닥다리식이라 느껴질 정도로 구차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다리 건너면 알지도 못하는 집안 어른들을 만나고, 이들이 던지는 무례한 질문에 대응해야 하는 명절은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논어니, 맹자니, 주자가례니 읊어 대며 이를 지켜 달라고 말한다면 젊은이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참 좋은 말이다.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사회는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오히려 옛것이 주는 안온함에 빠져 새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 네 글자로 숭고억신(崇古抑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때다.

특히 올해는 정치적, 경제적 격변으로 한 해의 문이 열렸다. 이럴 때일수록 세대 간 생각의 차이로 가족의 불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찌 보면 오래돼 바스러져 가는 책장 같은 구태의연한 유대감이나 이해를 가장한 동조 요구가 아니다. 적어도 다른 생각도 차분히 들어 보는 인내심, 내가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의 태도다. 아직도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정말 괴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슬프지만, 장강의 앞물은 뒷물에 밀리게 돼 있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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