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김태진] '노인을 반납합니다'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기력이 쇠하면 노인이라 불려도 역정을 내기 어렵다. 반박할 힘이 없어서라기보다 애써 역정 내 봤자 아무 득 될 게 없음을 간파(看破)했기 때문이다. 만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서 그런지 요즘은 반백 살도 청년이라 추켜세운다. 듣기 좋으라 하는 소리임을 모르지 않는다. 곧대로 믿고 '영포티'라며 스웩(swag) 부리다 눈치 없는 사람 취급 당했다는 제보는 익히 들었다.

미리 준비해서 무익한 게 있겠냐만 노년 경험은 그렇지 않다. 시중에 나온 '노인 체험복(80세 기준)'의 주요 기능은 그 나이대 신체 특성을 반영한 것일 텐데 ①쇠약한 손·발목 근력 ②둔감한 촉각 ③굽은 등·허리 ④흐린 주변 시야 등이 있다. 몇 걸음 내디디면 앉고 싶고, 종국에는 눕고 싶은데 집에만 있으라는 형(刑)을 받은 듯 우울해진다.

40대의 20대 흉내는 추종(追從) 가능한 영역인지 모르나 80대가 50대처럼 보이면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출연 제의가 온다. 80대의 건강에는 내밀한 상태도 감안돼야 한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건 애교 수준이다. 요의(尿意)가 있어도 의지만 있고, 의도는 방귀 분출인데 뜻밖의 현상에 놀라는 건 사소한 질환 축에 속한다. 주변의 따뜻한 배려를 갈망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1956년생 배해주 씨는 색다른 방식으로 우울을 떨친다. '노인을 반납합니다'라는 편지에 기부금을 넣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4년째 보냈다. 기부 취지는 이렇다. 노인이라 받은 혜택들을 남을 돕는 데 돌려주는 게 도리라 생각했고, 인생의 새로운 목표가 생겨 매일이 즐겁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만 65세가 되는 해부터 받은 노인 혜택, 예컨대 지하철 무료 이용이나 무료 예방접종 등 요금 감면을 현금으로 치환한 것이다. 올해는 21만7천원을 기부했다.

흔쾌히 노인이 되는 것도 여생(餘生)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노인에게 주는 혜택이 과도하다 할 수준은 아니다. 외려 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쌓아 온 무형자산, 인생의 지혜와 경험을 공유해 주는 게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강호의 고수를 찾는 수련자처럼 노인의 내공을 체계적으로 전수받으려는 시도도 의미 있어 보인다. 뭐든 데이터로 쌓을 수 있는 시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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