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아름다운 잡탕을 꿈꾸어도 좋으리

[책] 굴비 낚시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펴냄

[책] 굴비 낚시.
[책] 굴비 낚시.

특정 분야에 관한한 믿고 읽는 출판사가 있다. 예컨대 영화 관련 책을 펴낸 곳이 '마음산책'이라면 무한 신뢰를 가진다. 그 시작은 김영하의 '굴비 낚시'였다. '마음산책'은 '굴비 낚시' 외에도 김영하와 이우일이 함께 쓴 유쾌한 영화책을 펴냈다. 김영진의 '평론가 매혈기'도, 영화 분야에선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박찬욱의 오마주'도 모두 '마음산책'과 손잡은 결과이다.

'굴비 낚시'의 초판이 나온 건 2000년 10월이다. 나라는 IMF 구제금융을 일찍 졸업한다고 들떴거나 밀레니엄 버그의 원인모를 불안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영화는 아직 '플란다스의 개'의 봉준호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고, '반칙왕'에서 처음으로 단독주연을 맡은 송강호의 시대가 열리는 듯했으며,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은 곧 한국영화사에 이정표를 찍을 터였다.

책 안쪽 날개에는 우리가 아는 검고 두꺼운 뿔테안경의 김영하가 아닌 군대에서 갓 제대한 청년 같은 모습의 김영하가 있다. 이미 3권의 소설집과 2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어엿한 기성작가지만 여전히 호기심 많은 눈초리로 영화판을 기웃거린 결과, 소년기를 잠식한 산부인과 김간호사로부터 시작된(야한 얘기 아니다.) 영화적 삶이 그의 글쟁이 이력 한켠에서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영화 월간지 '스크린'에 기고한 글 18편을 모아 펴낸 게 '굴비 낚시'이다. 생선이면서 생선도 아닌, 어디서도 낚을 수 없는 굴비를 상상하며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굴비 낚시라 이름 붙인 것. 피를 팔고 그 돈으로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마시면서 피를 보충하는 허삼관의 모습에서 평론가의 정신적 매혈을 떠올린 '평론가 매혈기'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잰 체 난체하지 않으면서 속내를 텍스트로 재탄생시킨 영화 속 장면들은 마치 극장에서 '끝내주는 쇼트'와 맞닥뜨렸을 때처럼 강렬하다. 김영하는 셰익스피어에서 드라마작가 김수현을 보고, '쇼생크 탈출'에서 신창원을 불러온다. "방송작가는 아무리 잘 써봐야 이문열이나 조정래 대접을 받지 못한다."라면서 셰익스피어가 가졌을 법한 불안의 본질을 찾아낸다. 동시에 드는 생각, 지금의 김은숙 작가라면 어떨까.

"국가는 거대한 수도원처럼 손에 선물보따리를 쥐고 있다가 좀 살 만하면 나눠줬다가 조금 어려워지면 순식간에 거둬들인다."며 '쉘 위 댄스'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통렬한 한 방은 지금, 여기 한국사회와 정확하게 조우한다. "아버지, 대통령 각하, 어머니, 부장님, 저도 춤추고 싶어요. 다른 나라 구경하고 싶어요. 망해도 제가 망해요. 나라 탓은 안합니다. 대신 나라도 제 탓하지 마세요!" 가족과 회사와 국가를 위해 평생을 바쳐 일했는데 왜 나는 기쁘지 않은가? 왜 내 삶은 한없이 지루한가. 그렇게 다가오는 매혹적인 유혹이 "춤추지 않으시겠어요?" 곧 '쉘 위 댄스?(Shall We Dance?)'라는 얘기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한국사회 이야기, '굴비 낚시'가 유의미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 옳고 그름이 무의미해진 시대. 인간에 가까울수록 디지털의 정수가 되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신창원의 탈주극처럼 신출귀몰하거나, 취생몽사를 마시고 돌아오지 않는 애인을 기다리다가 죽거나,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잡탕을 꿈꾸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김영하가 말한 하릴없고 부질없는 굴비 낚시나 하면서.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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