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한국 산악계의 거목 박상열 대구산악연맹 고문님이 82세의 일기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셨다. 비보를 접하고 안타깝고 황망한 마음으로 고문님을 다시 기억해 보려 한다.
산악인 박상열은 모든 사람이 곰이라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선천적인 폐활량을 기반으로 산에 대한 땀과 열정을 통해 스스로 산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행동과 큰 덩치뿐만 아니라 사랑과 뚝심, 의리에서 또한 전설적인 '팔공산 곰'이었다. 우둔하다든가 행동이 굼뜬다는 비유로서가 아니라 산 쪽으로 몰입하는 외골수라는 표현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있던 1959년 까까머리로 대구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가입한 후 뛰어난 산 적응 능력을 보였다. 물과 산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고 올랐다. 경북학생산악연맹이 1960년대 초반 왕성하게 추진한 전국60㎞극복등행대회에서 1, 2, 3회 연속 우승과 하계산간학교, 동계적설기훈련등반 등 거의 모든 산악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대구를 대표하는 등반가로 성장했다.
1967년에는 경북학생산악연맹의 정예 멤버들과 함께 동굴협회를 창립하여 동굴 탐사와 스쿠버다이빙도 즐겼다. 그에게 바다는 어머니였고 산은 아버지였다.
1971년 대한산악연맹은 한국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고봉인 로체샤르(8,382m) 도전에 나섰고 경북 지역 출신 최연소(당시 27세) 대원으로 참가하면서 그와 히말라야와의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비록 로체샤르 원정에는 실패했지만 등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히말라야 여명기에 원정대원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로체샤르 원정 이듬해인 1972년 김정섭이 이끄는 제2차 마나슬루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원정대는 눈사태로 한국 원정 사상 가장 많은 15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금처럼 원정이 일반화되지 않은 '77한국에베레스트 원정'에서 등반부대장으로 참가, 1차 공격조에 선발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검증된 대원이었다. 특히 뛰어난 체력과 우직한 성격은 1차 공격조의 적임자였다. 한국에서 그 고도는 미지의 세계였다. 간절하게 원했던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은 그만의 바람은 아니었다. 밤새 기도하며 그의 등정을 빌었던 베이스캠프의 하나 된 염원이었고 나아가 전 한국 산악인들의 열망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상을 지척에 둔 8,760m에서 탈진한 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 최초의 무산소 비박을 감행하고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만약 1차 공격조가 등정에 성공했다면 2차에 등정을 이룬 고 고상돈 대원 대신 후대 사람들은 박상열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목숨을 걸고 뚫어 놓았던 1차 공격의 흔적이 2차 공격조의 등정 성공을 이룬 발판이 되었다는 자랑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곰에 빗댄 우직한 성품을 가진 우리나라 초창기 히말라야 등반사의 중심에서 활약했던 최고의 등반가였다.
죽음의 비박을 함께한 생명의 은인 두 셰르파를 한국에 초청해 산악인의 우정을 돈독히 하였다. 등반에서 보여준 강인한 정신력과 용맹함은 많은 산악인의 귀감이 되어 국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 수훈과 자랑스러운 대구시민상, 팔공산악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로체샤르와 에베레스트 원정 경험을 바탕으로 1983년 카라코람 K2 정찰대장을 거치고, 원정대장으로 참가한 1989년 대구산악연맹 한국초오유원정대를 한국 최초로 정상에 올렸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 불거진 등정 의혹과 수년 후 정상 등정 대원의 양심선언으로 그는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고 두고두고 회한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흰 산에 대한 갈망은 계속되어 1992년 아콩카쿠아 원정대장, 1999년 칸첸중가 원정부단장, 2000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단장을 맡았다. 또한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대한산악연맹 이사 및 부회장, 2001년부터 2년간 대구산악연맹 회장을 역임하며 산악계를 위해 많은 봉사와 노력을 했다.
안타깝게도 실패한 로체샤르 원정은 그에게 설맹과 후유증을 남겼다. 결국 로체샤르에 이어 에베레스트에서의 거듭된 충격 때문인지 왼쪽 눈은 점차 시력을 잃어갔고 마침내 실명 상태에 이르렀다. 그에게 에베레스트는 비록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등반의 최정점이었다.
또한 등반 이후에도 16번이나 네팔을 찾고 그중 12번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찾을 정도로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산악인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이라고 늘 말하곤 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돌아설 수 있는 자가 가장 용기 있는 산악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에베레스트에서 무리하게 등정을 감행했다면 정상에서 맞이한 것은 차디찬 죽음뿐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한국 히말라야 등반의 선구자로 한국 산악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극한의 순간에도 그가 보여준 강인한 정신력과 용기는 앞으로도 많은 후배 산악인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늘 등반가 조지 말로리의 명언을 말하며 자신의 산악 인생을 기억하고 음미했다. '산은 정복될 수 없다. 다만 내가 나를 정복했을 뿐 그곳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항상 어느 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든든하고 우직한 한국 산악계의 영원한 우상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영면하시어 영원한 안식 누리시길 바랍니다. 부족한 이 글을 영전에 바칩니다.
이석훈 전 대구산악연맹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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