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이 분위기 좀 봐, 좀 좋아

[책] 지금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최영실 지음 / 학이사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거칠게 말하자면 여행에세이를 즐기지 않는다. 당연히 애써 찾아 읽지도 않았다. 내가 읽은 여행기는 주로 범접하기 힘든 고통의 기록들이었다. 예컨대 우에무라 나오미의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또는 남난희의 백두대간 종주기 '하얀 능선에 서면' 같은 책들(내가 따라할 수도 없고 상상 못할 고난으로 점철된)이었다. 달리 말해,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다녀온 사람의 느낌과 기분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 미술관을 가도 도슨트를 청하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보고 듣고 배우는 동안 무지의 상태에서 겪을 수 있는 충격과 감흥이 휘발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런데도 출간된 지 3년이 넘은 책을 잡은 건 순전히 "글이 너무 좋아요"라는, 먼저 읽은 지인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여행작가 최영실의 '지금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를 그렇게 만났다.

각설하고, 산문인 줄 알았는데 시였다. 시심 가득한 단어의 조합인가 싶으면 곱다는 말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만드는 산문이었다. 그만큼 고운 시선과 발걸음이 글자가 되어 빼곡하게 담겼다. 사월의 진평왕릉을 좋아하는 사람, "저도 나를 모를 텐데 눈만 맞추면 되지, 했던 시절을 지나 꽃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이"가 된 저자는 세상 밖에서 세상 사람을 향해 속살거리듯 말 걸어온다. 언젠가, 내 책의 여백을 채워달라고.

'지금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는 외씨버선길에서 시작해 기청산 식물원을 거치고 통영 연화도와 수달래 피는 신성계곡에서 땀을 식힌 뒤 꽃비 내리는 봉정사에서 피안의 낙토를 꿈꾼다. 저자의 삶의 터전인 공룡들의 놀이터 태화강 백리길도 빼놓으면 섭섭할 터. 최영실은 서른네 꼭지로 구성된 여행담을 '더 없이 완벽한 여행의 기록'이라는 말로 펼치는데, 사진 한 장 없어도 모자람이 느껴지지 않은 건 "홀로 혹은 사랑하는 이와 여행을 꿈꾸는 당신이 마지막 빈 풍경을 채워준다면 더 없이 완벽한 여행의 기록이" 될 거라는 바람이 고스란히 도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지를 떠나오지 않으면 늘 잊게 된다"는 말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세찬 눈바람에 시야가 흐려질지언정 고달픈 한 해 시름을 걷어낼 수 있는 여유라니. 저마다의 나들이 취향은 다를지라도 저자가 조근조근 건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기어이 가보고 싶어질 터인즉. 60번 넘게 거제를 갔어도 지심도 동백과 외도와 해금강 구경에 관심 없는(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실종된) 내가 영양 외씨버선길과 기장 아홉산숲을 간다면, 그건 전적으로 이 책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 그의 행적을 따라 장항리 서 오층석탑에서 바람을 맞아도 좋고, 삼랑진에서 세 갈래 시간을 만나 오래된 미래와 새로운 과거를 직시해도 흡족하리라. 어쩌면 세상 다정한 말이 입안에서 터질지 누가 알겠나. "이 분위기 좀 봐, 좀 좋아."

영화평론가 백정우

부디 최영실이 "오만함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소백산의 능선을 타고내리는 석양을" 보게 되기를, 도포자락 휘날리며 굽이굽이 타고내리는 스님의 북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그의 두 번째 여행기가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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