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거대한 뿌리,구미]<16>산업화토대 금오공고의 탄생

금오공고에 있는 기능탑.
금오공고에 있는 기능탑.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이를 습득한 기술인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산업화는 우수한 기술인 양성

'정성(精誠)·정밀(精密)·정직(正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어 준 여느 학교와 다른 금오공고의 특별한 교훈이다.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성공에는 금오공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니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금오공고를 필두로 한 공고의 탄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술인력, 기술공의 대량 양성 없이 개발도상국의 산업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박 대통령은 간파했다.

"조국 근대화는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과 의욕을 환기시킴으로써 스스로 국가건설의 대열에 혼연히 참가하여야 한다. 지금 우리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과 인력과 기술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이를 습득한 기술인들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과학입국 기술자립' 휘호.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이를 습득한 기술인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선 공업고등학교를 대폭 증설해서 우리 국가가 요구하는 실기능력을 착실하게 갖춘 성실하고 자격 있는 기술자를 풍족하게 양성해야 하겠다. '어느 나라가 기술인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 그 인력의 질이 어느 나라 것이 가장 높으냐' 이것이 국제시장에 있어서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 박 대통령은 연간 기술인력 5만 명 양성을 독려했다

금오공고는 지난 1월 마침내 50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동안 1만7천여 명에 이르는 산업역군들을 통해 한국경제의 눈부신 성장을 이끌었다. 1973년 3월 거행된 개교식에서는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하는 공업기술을 흡수 소화하여, 한국 공업을 세계의 정상으로 이끌고 준엄, 냉혹한 수출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 현장에서 봉사할 정예중견역군의 육성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 과제를 직시하신 대통령께서는 공업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표본적인 교육기관 금오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지금 조국 근대화 작업이 방방곡곡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역사적인 시점에서, 본교는 공업입국의 중추적 역군을 육성하여, 국력배양의 전위가 되고자 힘찬 전진을 거듭할 것이다.'라는 설립취지가 선포됐다.

'공업입국', '기술자립 과학입국', 수출입국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산업역군 양성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그런 사명을 띠고 탄생한 금오공고였다.

1975년 금오공고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1975년 금오공고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1978년 구미 금오공고에서 안내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1978.09.21)
1978년 구미 금오공고에서 안내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1978.09.21)

◆ 산업역군 양성의 전초기지

박정희 대통령은 개척자이자 전략가였다. 산업환경이 아예 황무지와도 같던 이 나라에 과학기술인재 등 교육을 통한 국내산업 기반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공업화는 고사하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간파, 공업고등학교 설립을 통해 숙련기술인력을 집중 양성할 수 있도록 했다.

1970년대 초반 금오공고와 동시에 설립된 서울성동공고, 광주공고, 부산한독직업훈련원 등을 통한 산업기술 인재의 집중양성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공업고등학교가 배출한 숙련공들은 대한민국 제조업과 기술산업에 인적자원을 공급한 최고의 오아시스였고 이후 중화학공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오늘날의 세계 속에 당당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만든 최대공신이었다.

박복재 금오공고 교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금오공고 설립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 교장도 금오공고 졸업생이다.
박복재 금오공고 교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금오공고 설립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 교장도 금오공고 졸업생이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나라였다. 유교문화가 뿌리박힌 조선사회는 사농공상의 신분차별로 상업과 공업을 천하게 취급했다. 장사를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선비가 되고자 했던 조선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뒤처져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이런 사농공상 문화를 완전히 혁신했다,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하고 국가역량을 산업화에 집중시켰다.

과학기술처 공보관을 지낸 정진익 교수는 ▷한글창제와 ▷조선 개항, ▷원자력 도입과 함께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우리나라 4대 과학 발전계기로 꼽았다. 박 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1962~1966)과 동시에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수립·추진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를 설립했고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처를 설립(1967),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1971~78), 중화학공업육성정책 추진(1967~) 등을 연쇄적으로 추진했다.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은 오늘날 반도체·철강·자동차·조선강국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1월 '精誠·精密·正直'이라는 교훈도 휘호로 써서 내려 보냈다.

◆ '精誠·精密·正直'교훈

금오공고의 설립에는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이 밑바탕이 됐다. 박 대통령의 경제참모로 중화학공업육성을 진두지휘한 오원철 전 경제수석의 회고에 따른 금오공고의 탄생비화다.

"상공부가 주관해서 기계 계통의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소질이 있는 청소년을 선발, 일본의 실기교사를 초빙해서 집중적인 교육과 실습을 시켜 「시아게」정신을 도입함으로써 우수한 기계 기술공이 될 수 있는가를 평가해 보기로 했다. 이는 '한일경제각료회의'에서 논의한 사안이기도 해서 일본이 지원한 '한일경제협력기금'을 이용, 기술고등학교를 시범설립하기로 했다."

일본조사단이 직접 구미에 와서 조사를 했고 구미전자공업단지로 부지가 결정되고 나서 박 대통령은 몇 번이나 현장을 직접 찾을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1971년 3월 학교 부지 6만 평을 확보하고, 4월 20일 공사 착공한 데 이어, 8월 16일 금오학원 설립인가가 나왔다.

박 대통령은 개교에 앞서 1973년 2월 20일 '金烏工業高等學校'라는 휘호를 썼고 1976년 1월 '精誠·精密·正直'이라는 교훈도 휘호로 써서 내려 보냈다. 금오공고에는 이처럼 박 대통령의 깊은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구미 금오공고 전경
구미 금오공고 전경

금오공고에는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학비는 물론 기숙사도 무료로 제공됐고 교복과 학용품도 지급하는 등의 장학혜택이 있었다. 신입생 선발기준은 시험성적이 아니었다. 우수한 기술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오기 있는 학생만이 자격이 있었다. 전국 각 학교장 추천으로 성적 10% 이내 우수학생을 각 시도 교육위원회를 경유, 1차 선발한 후 적성검사와 신체검사 및 면접으로 최종 선발했다.

금오공고는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81년 공업교육을 일반고교의 교육과정과 통합하면서 특성을 잃기 시작했고 1995년 학교법인이 공립으로 전환되면서 전환점을 맞기도 했다. 2010년 금오공고는 기계·전자분야 모바일 마이스터고로 지정되면서 다시 궤도를 찾았다.

금오공고를 필두로 한 공고와 직업훈련원을 통해 배출된 산업기술인재는 1973년부터 박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무려 80만~100만 명에 이르는 규모에 달했다.이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명수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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