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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노경석] 기술은 규제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노경석 경제부 경제팀장
노경석 경제부 경제팀장

최근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가 저비용으로 생성형 인공지능(AI) 모델을 학습시키며 글로벌 시장을 뒤흔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자금과 인력,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AI 연구개발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꾼 것이다. 반도체와 AI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과감한 대응이 요구된다. 그러나 연구개발을 주도할 기업들에는 '주 52시간 근무제'라는 제도가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 근무제는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반도체와 같은 첨단기술 산업에서는 오히려 혁신(革新)을 저해(沮害)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연구개발은 창의성과 몰입이 중요한 영역이지만, '주 단위' 근무시간 제한으로 인해 몰입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의 법률상 근무자가 자발적으로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하더라도, 기업이 이를 허용하면 처벌받는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업무를 마쳐야 하며, 이 제약(制約)이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한국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 제도를 통해 고소득 전문직 근로자에게 주간 노동시간 규제(規制)를 예외적으로 적용한다. 일본 역시 연구개발 인력에 대해 유연한 근로시간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엔비디아(NVIDIA)나 대만의 TSMC 같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24시간·7일 가동 체계를 유지하면서 연구개발 인력이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주 52시간 근무제'라는 제약 속에서 긴급한 프로젝트조차 연구자들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다.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혁신적인 기술 개발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연구개발 과정은 단순히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업무가 아니다. 심층적인 분석과 창조적인 문제 해결이 요구되는 만큼, 연구자들은 충분한 몰입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주 52시간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은 연구개발을 단순한 근로 개념으로 묶어 버리고 있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전 구글 CEO 에릭 슈미트(Eric Schmidt)는 "기술 혁신이 규제 속도를 앞질러 가고 있으며, 정부는 이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의 경직된 근로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 선진국들이 연구개발 인력을 위한 유연한 근무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반도체와 같은 차세대 기술이 핵심이 된 지금, 연구개발 인력의 창의성과 몰입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산업의 특성과 글로벌 트렌드를 고려한 유연한 근로시간 제도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은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 연구개발 인력에게 더 유연한 근무 환경을 제공해야 하고, 주어진 시간 안에 업무를 마쳐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술은 규제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가 늦어질수록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약화될 것이다.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과감한 변화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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