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김교영] 을씨년스러운 시절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을씨년스럽다. 동장군(冬將軍)이 기세를 부려서가 아니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스산하다. 나라가 짙은 안개에 갇혔다. 그 안개, 언제 걷힐지 모른다. 열차는 궤도를 이탈한 채 달린다. 뒤집어지지 않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위기 때 복원력이 강한 국민이라고, 곧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속도, 너무 더디다.

'을씨년스럽다'란 말은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乙巳年)에서 비롯됐다.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이재운 편저)은 "을씨년은 1905년 을사년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조약(늑약·勒約)으로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온 나라가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로 몹씨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을사년스럽다'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을씨년스럽다'로 바뀌었다.

다른 을사년에도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1545년 을사사화(士禍)다. 4대 사화 중 마지막인 을사사화는 외척 세력의 싸움에서 사림파(士林派)가 숙청된 사건이다. 1905년 을사늑약 후 다시 맞은 을사년에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이다. 국교를 정상화하고, 보상금을 받아 경제 발전의 종잣돈으로 삼았다는 평가와 함께 일본의 명확한 사과와 배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 협정이다.

2025년 을사년도 을씨년스럽다. 을사늑약 후 육십갑자(六十甲子)가 두 바퀴 돌았지만, 그 을씨년스러움이 새삼스럽지 않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국민들은 찬반(贊反)으로 갈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만 '진실'이고, 다른 것들을 '거짓'으로 여긴다. 신문과 방송의 기사를 불신하고, 유튜버들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신뢰한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법원, 검찰, 경찰은 모두 엉터리라고 한다. 먹고사는 것이라도 편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얼음장이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국태민안(國泰民安)…. 입춘방(立春榜)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부질없는 부적 같다. 그래도 봄은 기필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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