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와 매화 사이에는 겨울도 봄도 없다. 그래서 매화는 계절이 아니라 정신의 화신(化身). 아니 하나의 '통점'(痛點)이랄까. 식물이라 분류하기도 좀 뭣하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너무 자욱한 탓이다. 여느 꽃은 화려함의 극치를 찍지만 매화는 조촐함과 질박함을 '퇴락미'(頹落美)로 갈무리해버린다. 그 망울은 오열 직전 상주의 눈매를 닮았다. 희(喜)보다는 애(哀)에 가깝다. 움이 터지기 직전, 탄알처럼 생긴 탱글탱글한 그 꽃망울, 빙하 속에 갇혀 있는 기포의 정령이 서릿발처럼 돋아난다. 성긴 눈발 같다가도 일순 달빛 같이 서성대기도 하고. 가시에 찔린 손끝에서 이슬만큼 돋아나는 선혈(鮮血)의 질감이랄까.
◆ 피는 듯 마는 듯
매화가 몰고오는 봄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광대역이다. 1월부터 시작돼 족히 5월까지 뻗친다. 1월의 봄은 '춘중동(春中冬)', 2월은 '춘중춘(春中春)', 3월은 '춘중하(春中夏)', 4월 이후는 '춘중추(春中秋)'이다.
매화는 뿌리는 선비의 가슴에 있다. 그래서 그런가 퇴계 이황은 매화를 '매형'이라며 도반으로 삼았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매분에 물을 주라고 당부했을 정도다. 화가 김홍도는 어느 날 그림을 팔아 3000전이라는 큰돈이 생겼다. 그는 2000전을 털어 매화나무를 사고 800전으로 술 여러 말을 사다가 친구들과 매화나무 아래에서 술을 마셨다.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한다. 다산 정약용도 한 풍류를 일궈냈다. 그는 '죽란시사'(竹欄詩社)란 풍류계(風流契)를 애지중지했다. 14명이 계원이었는데 모이는 날짜도 굳이 정하지 않았다. 그냥 매화꽃 피는 날 정도로 봄팅 날짜를 운치 있게 정했다.
다들 벚꽃이라야 봄이 온 줄 안다. 하지만 천석고황(泉石膏肓‧자연을 그리는 지극한 맘)의 심미안을 가진 자들은 입춘 즈음 매화 향기로 봄을 영접한다. 매화는 하르르 떼거리로 몰려 와장창 피고 일시에 전멸해버리는 벚꽃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걸 거부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부자기 왔다가 소리소문없이 새끼 손톱 만하게 사라진다. 매화 잎의 장수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달라진다. 한 장이면 '홑잎매', 두 장이 포개지면 '겹잎매', 그리고 여러 장이 겹쳐지면 '만첩매'라 한다.
◆첫 매화소식
첫 매화 소식을 기다렸다. 올해는 지난달 21일 전남 광양 매화마을 소학정 매화 꽃 하나가 만개했다. 언론에서는 일제히 을사년 첫 매화로 보도했다. 뒤를 이어 지난 2일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 인근 홍매화가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30년째 '고매인문학'을 나름대로 정리해 오고 있다. 파도 파도 끝없는 스토리가 스며나온다. 매화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두 분의 고인이 생각난다. 국회의원과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문태갑과 이상희 전 내무부장관이다. 문태갑은 호연장귀하기 위해 일찌감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 세거지 인흥마을로 돌아와서 색색의 매화를 심어나갔다. 지금은 핫플 매원이 됐다. 흑매‧백매‧홍매가 몬드라인 색면분활화의 미감으로 다가선다.
이상희는 2019년 3월 평생 모은 3천500여 점의 매화관련 유물을 성주군에 기증한 바가 있다. 그는 또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養花小錄)과 함께 국내 한 권밖에 없는 필사본인 '화암수록'(花菴隋錄)을 발굴하기도 했다.
매실을 위해 사육되는 일반 매화는 너무 장사치 매화 같아 싫다. 우람한 가지에서 누에고치 같이 돋아나는 고매(古梅)의 치명적 아름다움만을 좇고 있다. 한강 정구의 정신이 스며든 성주 '회연서원'의 매원도 내 사정권에 있다. 만개 시점이 아니라 20~30% 피었을 때 가장 매력적인 풍광이 나오기 때문에 그 타이밍을 맞춰 방문한다.
그 다음은 대덕문화전당 맞은편 현충로 삼거리 옆 화단에 수양매 여러 그루도 나만의 포토존이다. 여느 매화 잎의 3분의 1 크기라 더 보기가 좋다. 며칠 전 보니 망울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까지 충혈돼 있었다.
◆와룡매와 운용매
오랜 세월 '골동벽'(汨董癖)을 조탁하고 있는 시조시인 박기섭도 유별난 탐매가이다. 나름 매화론을 적어보고 싶다고 하니 그가 4대 봄꽃을 알려준다. '매화‧도화(복사꽃)‧이화(배꽃)‧앵화(살구꽃)'라 일러준다. 그의 청도 누거에는 운용매(雲龍梅)가 벅수처럼 좌정하고 있다. 수평으로 구불텅 사행(蛇行)하는 와룡매와 달리 하늘로 피어오르는 아련한 곡선을 그려대는 매력을 갖고 있다. 그의 집에 운용매가 피면 지인들과 '매팅'을 하자고 약속을 했다.
와룡매는 '별매'(別梅)라서 일반인의 눈에는 잘 뜨이질 않는다.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 앞, 김해 구산동 김해건설공고 교정, 담양 소쇄원 옆 지실마을이 잘 알려져 있다. 남산 와룡매는 원래 창덕궁 선정전 앞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다테 마사무네가 캐어 가버렸다. 1999년 그 후계목 두 그루를 기증받았는데 그 중 한 그루가 2023년 태풍 때 부러져 안타깝게 죽어버렸다.
◆납매의 추억
매화도 1·2·3월매로 나뉜다. 수종만큼이나 그 계보 파악이 쉽지 않다. 납매(臘梅‧음력 12월). 참 헷갈리는 매화다. 통상 수입종 납매와 섣달에 피는 재래종 납매는 다른 종이다. 대구수목원에 있는 납매는 꽃 모양이 개의 이빨을 닮았다 해서 '구아(狗牙)납매', 일명 중국 수입종인 '당매'(唐梅)로 개나리꽃처럼 노란색이다.
재래종으로는 통상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금전산 금둔사의 '납월홍매'를 알아준다. 금둔사 경내에는 홍매화와 청매화 여섯 그루 등 1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6그루는 각기 일련번호를 달고 있다.
◆방방곡곡 매화촌
일단 고매는 호남이 압권이다. 현재 국가유산 천연기념물 고매는 모두 5 그루. 강원도 율곡매를 제외하고는 모두 호남에 몰려 있다. 이름하여 '호남5매'이다. 지리산 화엄사는 현재 국내 최강 고매의 심장부다. 천연기념물 고매가 두 그루. 길상암 앞 연못가에 기우뚱 자라고 있는 450년 먹은 흰 '들매화(485)'와 최근 지정된 각황전 옆 화엄매다. 들매화는 사람과 새 등이 먹고 버린 씨앗이 발아해 성장한 건데 그 자태가 삼베옷을 뒤집어 쓴 장승 같다. 나는 부끄럽게도 지난해 생애 처음으로 절정의 화엄매를 친견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보니 '적불'(赤佛)로 보였다. 합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매화는 이름이 두 개다. 너무 붉은 빛이라 '흑매', 그리고 계차 선사가 조선 숙종 때 장육전 자리에 각황전을 지으면서 기념으로 심어서 '장육매'로도 불린다. 수형이 기가 막힌다. 지금은 고사되어 버린 울진 대왕금강송의 휘감겨진 가지보다 더 여러 번 똬리를 틀고 있다. 그 휘둘려진 가지는 상‧하단군 가지와 앙상블을 이뤄 절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단연코 국내 최고 고매다. 원래 가지가 4개였는데 2개가 사라지는 바람에 더 고혹한 미감을 안겨준다. 지난해 사진콘테스트가 진행됐던 36일간 무려 30여만 명이 다녀갔다. 홈페이지에서 실시간 개화 정도를 알려주니 참고한 뒤 출발해야 허탕 치지 않는다. 예전 선비들은 청매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홍매의 세월인 것 같다.
2매는 순천 선암사 선암매(488호).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우소(뒤깐)를 가진 이 절 곳곳에 흩어져 사금처럼 피어난다. 화엄매와는 달리 흰색도 분홍색도 아닌 아련한 색을 쏟아내는데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3매는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溪堂梅), 4매는 전남대 대강당 민주마루 옆 대명매(大明梅), 5매는 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매(古佛梅‧486호)다. 만첩매인 전남대 대명매는 담양 창평면 출신 월봉 고부천이 1621년 명나라 특사로 갔을 때 희종 황제로부터 매화를 하사받은 건데 11대 후손 고재천 전 전남대 농과대학장이 후손목을 1972년 기증한 거다.
율곡매(484호)는 90% 이상 고사 돼 천연기념물 해제 위기에 봉착했다가 다행히 회생됐다. 율곡이 한때 문묘에 봉안됐다가 불교에 심취한 이력이 문제가 돼 잠시 퇴위됐다가 다시 재봉안 된 이력과 너무 닮은 꼴이다.
이밖에 탐매족들이 비망목에 적어놓는 고매 포인트를 좀 정리해보자. 통도사 자장매는 영남권의 좌장급 고매다. 안동 2매는 도산서원 퇴계매와 하회마을 서애매, 전남 담양은 고매의 고장 답게 '담양 8매'가 있다. 소쇄원 소쇄매, 소쇄원 지실마을 계당매, 죽림매, 명옥헌매, 하심매, 독수정매, 장전매 등이다. 그리고 남도 문인화의 발흥지랄 수 있는 진도 운림산방의 '일지매'도 인기가 좋은데 초의선사가 도반인 허치 소련에게 선물한 건데 가지가 한 방향으로만 자라 지주를 걸어놓았다. 그리고 섬진강 최참판댁 길목 가로수 매화인 가로매(街路梅)도 눈여겨 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단연코 매화아줌마 홍쌍리 여사의 꿈의 동산이기도 한 광양군 '섬진강 매화마을'을 찾아보라. 무진장매화원의 위력을 실감할 것이다. 매화축제는 3월15~16일. 매화향을 가까이 하면 차처럼 산해진미에 둔감해 지게 된다. 도력이 높아지면 식탐은 멀어지고 좋은 물과 공기 정도에도 '감사감사'할 거다.
wind30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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