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청동기 시대에 고조선의 원핵이 생성되다

"고인돌·비파형 동검·청동거울 문화 공유 동일 문화권 형성"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비파형 동검.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비파형 동검.
내몽골 적봉시 삼좌점성의 성벽.
내몽골 적봉시 삼좌점성의 성벽.
요동반도 해성의 고인돌.(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모델)
요동반도 해성의 고인돌.(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모델)
요녕성 요양시 요양박물관에 전시된 비파형(청동) 단검.
요녕성 요양시 요양박물관에 전시된 비파형(청동) 단검.
요녕성 조양 십이대 영자에서 발굴된 청동인물 장식.
요녕성 조양 십이대 영자에서 발굴된 청동인물 장식.
요동반도 남쪽 개주에 있는 석붕산 고인돌.
요동반도 남쪽 개주에 있는 석붕산 고인돌.

'조선'(朝鮮)은 한민족이 처음 만든 정치체이며, 현대 한민족을 토대로 소급해 올라가면 계승성과 정통성의 근거가 되는 정치체이다. 소위 '고조선'(古朝鮮)이지만 나는 '원(proto)조선'이라고 부른다. 그 조선의 선행단계인 모(母)조선, 선(先)조선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성됐을까?

청동기 시대는 자원 생산과 원거리 상업망이 필요했고, 기술자 집단과 거주지를 보호하고 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큰 도시(정치와 시장 기능)를 만들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국민'이라기 보다는 '생활인'이었고, 공간도 '정치권'이 아닌 보다는 '문화권', '생활권'이었다. 때문에 청동기 시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닌 지방 분권적인 '도시 국가'였다. 그렇다면 고조선도 유사한 과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우선 고조선이 발생한 공간에 대해서는 요동설, 요서설, 이동설, 대동강설 등이 있다. 건국한 시기를 놓고서는 서기 전 3천년 설, '삼국유사'의 단군기록과 하가점 하층문화을 연동시켜 서기 전 24세기경 설,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을 근거로 서기 전 15세기~13세기경 설, 여기에 문헌사료를 중시한 bc 7세기 설 등이 있다. 필자는 단군신화의 내용, 청동기 등의 유적 유물의 연구성과, 사료들에 필자의 이론을 적용하여 1기·2기·3기라고 나누었다.

◆고조선 정치권의 생성과정

제1기는 서기전 24세기 전후한 시대부터 서기전 16세기까지로서 산업 및 농업이 발달하고, 청동제 무기와 생산도구들을 사용한 청동기 시대였다. 요서 지역은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로서 유적지는 3000 곳이 넘었는데, 많은 주거지와 함께 70여 개의 석성들이 발견되었다.

지가영자성, 삼좌점성 등 대표적인 성들은 큰 환호(해자)를 둘렀고, 성벽에는 견고한 '치'(雉)를 갖춰 방어력이 뛰어났다. 중국인들이 이 성들을 '방국'(方國)으로 명명했지만, 일종의 도시국가(city state, hill top town)이다. 그러면 '하가점 하층문화'의 담당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집단일까?

중국학자들은 당연히 중국과 연결시킨다. 반면에 북한은 고조선 주민들이 창조한 문화로 해석하고, 남한의 김정학, 윤내현, 이형구, 한창균 등도 고조선과 관계 깊다고 주장했다. 각각 예맥족, 동이족 등의 다양한 표현을 쓰지만 고조선의 주민들이라는 주장이다.

제2기는 서기전 15세기부터 서기전 7세기로서 문화의 특성과 역사상을 고려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지표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의 고인돌과 청동단검(비파형), 청동거울(다뉴조문경), 토기(미송리형), 거주지, 산성, 무덤 등이 있다. 요서에서는 위영자 문화를 이어 하가점 상층문화와 십이대영자 문화가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고인돌 문화

고조선 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유물로서 장기 지속성(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 후까지)을 지닌 고인돌 문화가 있다. 고인돌은 요서지역에 없지만, 요동 지역에는 약 600기 가량 있고, 남쪽인 요남 지역에도 100여기 있는데, 대체적으로 서기전 1천500년 전후의 것이지만, 장산군도의 소주산 고인돌은 4천여 년 전의 것이다.

압록강 수계와 혼강 수계는 물론이고, 산동성과 절강성 해안에서도 발견됐다. 북한 지역은 청천강, 대동강, 황해도 지역 등에 수천기 있고, 이를 토대로 북한은 '대동강 문화권'을 만들었다. 남한에는 전국에 분포하고, 큐슈 북부에도 여러 기가 있다. 그런데 평양 일대는 초기형에서, 중기형, 말기형까지 다양하므로 이 곳을 자생지이면서 '핵'(core)으로 바다로 북상하여 요동만 발해만까지 이어지면서 고조선 문화권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비파형 동검문화

또 하나의 지표 유물은 '비파형 동검'이다. 칼 몸이 악기인 비파 모양인데, '고조선식 동검' 또는 '요녕식 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자원의 희귀성, 기술력의 압축, 고도의 상징성과 미감으로 인하여 정치 도구와 신물(神物)로서 사용됐다.

하가점 상층문화에서는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됐다. 첫 제작 시기를 9세기 설 또는 12세기 설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시기가 올라 간다. 요하 상류부터 남쪽으로 연산산맥 이남, 하북성 서북부, 산동성, 내몽고 동남부, 길림과 중만주 지역, 연해주,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의 모든 지역, 일본열도의 큐슈 지역에서 조사되었다.

산동 지역에서도 발견되었고, 연해주 일대에서도 확인되었다. 2천년까지 모두 331개가 출토됐는데, 3분의 1 정도가 요서지역이고, 특히 조양의 십이대영자 무덤은 서기전 8세기~서기전 7세기의 유적으로 비파형 동검들이 발견됐다. 요동반도 남쪽인 대련의 서기전 8~7세기의 돌로쌓은 강상무덤에서 비파형 청동검 9자루를 비롯하여 많은 청동제품들이 발굴됐다.

한편 남만주의 길림을 중심으로 한 부여와 연관 깊은 '서단산 문화'의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을 비롯하여, 서단산토기(미송리형 토기) 등이 발굴됐다. 그런데 이 동검은 요녕성 남산근 유적의 청동검(서기전 9세기) 및 부여 송국리 유적의 청동검(서기전 7세기)과 동일하다. 청동검의 유사성으로 보면 요서지역 요동지역, 길림지역, 한반도 지역은 동일한 문화권이다. 그리고 발원지와 중심지는 요서지역일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이 놀랄만한 청동검을 제작하고, 사용한 주체는 누구일까? 한국의 학자들은 대부분 고조선인으로 보지만 중국 및 일본학자들은 동호족으로 본다. '산해경'에서는 '동호'(東胡)를 흉노인 '호'(胡)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했고, 흉노를 위협하는 존재이니 '조선' 외에 다른 정체체는 없다. 거기다가 중국 지역이 서북방의 유목국가 등과 경쟁을 벌이는 상황을 고려하면 조선 또는 그와 연관된 존재인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청동검의 주체를 예맥족 또는 맥(북한)으로 보고, '예맥 문화권'을 주장하기도 한다(박경철).

◆청동거울 문화

청동기 시대의 후반에 고조선 문화권에는 청동(잔무늬)거울이 등장했다. 기술력과 상징성, 미학으로 인해 고대 신앙과 정치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신물이다. 현재까지 90여 개 정도가 한반도와 요동과 요서지방, 그리고 소량이 일본열도에서 발견됐다.

서기전 5세기에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요서 지방의 서기전 9~8세기의 '십이대영자' 무덤의 1호, 2호, 3호에서 청동거울이 비파형 동검과 함께 출토됐다. 특히 3호에서 발굴된 청동 거울은 뒷 면에 번개무늬 장식과 3개의 꼭지가 달려서 고조선 후기에 사용한 청동 거울의 원형으로 추측된다. 결국 청동거울을 사용한 지역은 고조선의 생활권이나 무역권의 범주 또는 영토에 해당 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고조선 문화의 지표 유물은 미송리형 토기이다. 서기전 1천년 전반기의 요동과 압록강 유역 등 서북 조선 지역에는 전형적인 것이 있다. 요녕 지역의 고인돌과 돌널무덤에서는 토기들과 함께 비파형 동검이 발견됐다. 길림과 장춘 지방에도 비슷한 서단산자형 단지가 있다.

이 시대에 발해 유역인 요동과 요서의 주민들은 주변의 지역들과 연안과 해양을 통해서 문화 교류를 활발하게 했다. 또한 북방초원 지대까지 문화 교류가 있었다. 하가점 상층 문화에서 북방 스키타이 계통의 부장품도 발굴됐기 때문이다.

특히 후기 스키타이 조형의 특징인 동물투쟁 주제의 금제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는데(권영필), 요녕성의 남산근 3호묘에서는 재갈, 마면같은 마구가 출토됐다. 이러한 스키타이 문화는 시간이 흘러 한반도 남부에서도 발견 됐다. 이처럼 bc 11세기 무렵에 고조선 문화권과 직결된 요동지역의 쌍방문화권과 길림지역의 서단산 문화, 한반도 서북부 지역은 고인돌, 적석묘, 석관묘 등과 미송리형 토기, 비파형동검 등을 공유하는 동일한 문화권이며(백종호), 결속력이 약한 정치권일 가능성이 크다.

◆국가로서 등장

이 시대에 요서 지역에서 서남진했던 상나라는 주나라에 멸망했고, 이 과정에서 '기자의 동천'과 발해 연안의 도시국가인 고죽 등과 함께 숙신·발·조선·예맥·진번 등의 존재가 중국 사료에 기록된다. '동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동이계인 고죽국은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연관이 깊었다. 이어 유라시아 동부에서 초원유목 문화가 남진하면서 '산융', '험윤' 등이 등장했다. 고조선은 이러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속에서 중국 지역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

고조선은 요동과 요서 지역, 한반도 서해안 지역에서 토지를 활용하는 농업과 철, 금, 은의 광업이 발전했다. 서북쪽의 초원에서는 유목이, 북만주와 동만주의 숲에서는 사냥업, 강어업, 모피산업을 발달했다. 또한 발해만과 서해안에서는 어업을 위주로 무역, 조선업 등 해양경제가 발달했다. 요동반도의 강상무덤은 서기전 7세기 경의 무덤인데, 내부에서 무역품인 아열대산의 자안패(보배 조개)와 771개의 구슬이 나왔다.

이처럼 청동기시대 후기에 오면 생산력과 군사력이 증강하며 문화가 발전하면서 부족 또는 종족 내부에서 자체의 통합과정이 활발해졌다. 또한 중국 세력과 유목 세력, 고조선 세력들은 본격적인 경쟁체제가 됐다. 때문에 중국 지역 및 남만주 지역에서는 규모가 큰 도시국가들이 결속력이 강한 연맹체들로 탄생했다.

다만 고조선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의 지형, 기후 등 다양한 생태환경으로 인하여 중국처럼 1지역에 정치권력이 집중되는 체제는 이룰 수 없었다. 지형을 고려하고, 문화의 성격과 고인돌, 비파형동검, 무덤, 산성, 토기, 청동거울 등 지표유물들의 분포도를 고려하면 대략 대동강 유역, 요동, 요서, 길림 지역 등의 4개 권역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 공간들은 청동기 시대의 초기에는 '생활권', '문화권'의 개념이었으나 점차로 도시국가의 성격을 갖다가, 후기에는 도시국가 연맹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한편 고조선 문화권은 주민들의 자유로운 의지, 또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확장되었다. 한반도의 중부 이남에서는 고인돌이 다량으로 축조되고,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형 등의 토기들이 출현했다. 이 시기에 한강 상류에서 발전한 문화가 중도 유적이다. 이미 4천500년을 전후한 신석기 시대부터 집단 주거지였지만,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고인돌과 토기들, 비파형 동검까지 발견됐으며, 대규모의 주거지와 방형의 방어시설을 갖춘 것으로 보아 도시국가였을 것이다.

청동기 시대에 이렇게 생성된 고조선의 원핵들은 그 후 철기문화가 시작되면서 기원전 7세기경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며, 동아시아 세계의 한 주역이 된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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