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930년대 대구 여름철 더위는 조선 최고" 당대 행정·산업·생활상 한눈에

대구광역시, 1934년판 '대구안내' 번역본 공개
대구~경상도 '자동차 만능 시대'…인도·동남아 사과 수출
유권자, 부회(현 시의회) 중 조선인 비율 현저히 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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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판 '대구안내'에 수록된 사과 출하 모습. 대구광역시 제공

대구는 1930년대에도 여름철 더위가 '조선 최고'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33년에는 '녹화협회'가 설립돼 대구 전체에 상록수와 관상수를 심기 시작했다. 인구는 1906년 약 1만2천명에서 1933년 1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단거리 교통망이 발달해 대구에서 경상도 일대를 연결하는 '자동차 만능 시대'가 됐다. 대구 사과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인도로까지 수출돼 대구의 대표 특산물로 자리잡았다. 또 어느 신문 지사장은 바둑을 좋아하고, 어느 상점 아들은 학교 야구팀 포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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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판 '대구안내' 원문 표지

대구광역시는 1930년대 대구의 인구, 행정, 사법, 교육, 산업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종합 기록물 '대구안내'(1934년판) 번역본을 공개한다.

'대구안내'는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5년부터 1934년까지 5번 간행됐다. 대구광역시는 그중 1905년판과 1918년판을 2023년에 번역·공개했다. 번역에는 최범순 영남대 일어일문학과 교수가 책임번역자로 참여했다.

책에는 당대 대구부(大邱府) 지도와 다양한 사진 자료들도 함께 수록돼 이해를 돕는다. 특히, 이 시기 건립된 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현 대구근대역사관),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 의과대학), 미나카이 백화점 등에서 당시 일본인들이 근대를 대구에 이식하려 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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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판 '대구안내'에 수록된 대구공회당 (현재의 대구콘서트하우스 위치). 대구광역시 제공

정치적인 변화도 살펴볼 수 있다. 1931년부터는 제한적인 자치제가 실시돼 대구부윤(현 대구시장)이 의장을 맡는 정원 33명의 부회(현 시의회)가 설치됐다. 하지만 일정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내야 유권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1933년 당시 총 유권자 4천64명 가운데 조선인은 1천446명, 부회 의원 33명 중 조선인은 8명에 불과해 격차를 보였다.

또한 시민들의 상세한 정보와 함께 골프장, 수영장의 설치·운영 등 당시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자료들은 온라인에서 일정 기간 공개‧검증한 후 대구사료총서로 발간한다. 대구광역시 홈페이지(대구소개-역사-대구역사자료)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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