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요일 아침-하영석] 미국의 후회, 전략상선대

하영석 한국해운항만학술단체협의회장(계명대 명예교수)

하영석 한국해운항만학술단체협의회장(계명대 명예교수)
하영석 한국해운항만학술단체협의회장(계명대 명예교수)

피아 구분 없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이 전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상선과 군함을 동맹국에서 건조할 수 있도록 하는 약칭 '조선 및 항만 인프라법(SHIPS Act)'과 '해군 준비 태세 보장법(Ensuring Naval Readiness Act)'이 지난 연말 각각 발의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부터 한국의 조선산업을 극찬하며 협력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으로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군사력의 핵심은 해양력(Sea Power)으로 해군력을 바탕으로 바다를 지배할 수 있는 총체적 능력이다. 여기에는 해양자원 개발, 해상 석유 플랫폼, 어선 선박, 조선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제무역에 투입되는 상선대 등이 포함된다. 전 세계 무역량의 90%가 해상운송되고 있는 현상에서 미국의 조선 능력 부족은 해양력 약화의 근원이 되고 있다. 특히 미국 내항운송에 사용되는 선박은 존스법(Jones Act)에 따라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하며, 미국 선원이 승선해야 하기 때문에 선박 부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2023년 기준, 세계 1위의 수입국이며 2위의 수출국인 미국은 1990년대 후반까지 세계 컨테이너 선대 15.9%의 선박을 보유한 해운·조선 강국이었다. 말콤 맥린이 개발한 '컨테이너 박스'로 제2의 운송 혁명을 촉발한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인 씨랜드(Sea Land)와 APL 등이 있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해운·조선 보조금 지급 중단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씨랜드는 1999년 덴마크의 머스크에 매각되었다. 80여 개에 달하던 조선소도 20여 개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미국의 후회' 단초가 되었다. 이는 기업의 혁신성, 수익성, 효율성 등 단기적 성과에 매몰되어 기간산업으로 국가 생존과 안보에 직결되며 장기적인 투자가 요구되는 해운과 조선산업을 방관한 결과였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3년 건조된 선박 총톤수의 점유율을 중국 51%, 한국 28%, 일본 15% 순으로 발표하였다. 3개국이 전 세계 선박 건조량의 94%를 점유하고 있다. 미국은 군함 건조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인 0.1% 비중을 보였다. 미 국적 상선대도 80여 척으로 미국 수입 재화의 2% 정도만 운송할 수 있는 미미한 수준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SHIPS Act'를 발의하였다. 이 법안의 핵심은 향후 10년간 전략상선대를 250척으로 확대하여 비상시 국가 운송 안보를 강화하는 것과 조선업의 부활이다. 전략상선대는 평상시에 상업적으로 활용하다가 전시에 병참 지원에 동원되는 선박으로, 이의 확보를 통해 정부 조달 물자의 100%, 중국 수입 화물의 10%, 원유의 10% 이상을 운송할 계획이다. 한국은 2022년 기준 총 1천190여 척의 외항 선박 가운데 총톤수 1만 톤 이상 248척 중 88척을 전략상선대 성격의 국가필수선대로 운영하고 있다.

역사가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경제적 흥망은 군사 대국으로의 성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미국의 해양 패권에 대한 중국의 도전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의 해양 잠재력 평가(2023)에서 미국은 해양자원과 해군력 측면에서 중국에 월등히 앞서 있지만, 상선대, 조선 능력, 항만, 수산 등의 해양 활동에서 크게 뒤처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과 홍해 사태를 겪으면서 미국의 해상운송 능력과 통제력의 상대적 취약성이 드러나자 전략상선대를 추진하고 있다.

세계 6위의 수출 대국으로 수출입 화물의 99.7%를 해상운송하고 있는 한국은 '미국의 후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 핵심 기술 인력의 유출 문제, 국내 최대 해운선사인 HMM의 처리 문제 그리고 해운·조선 통합 관리 체계 구축 등에 대해 정부 차원의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아울러 미국의 전략상선대 및 군함 건조 지원을 마중물로 한미동맹을 자유세계의 이념을 확산하는 가치동맹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조선 분야 협력을 넘어 소형모듈원자로, 반도체, 인공지능, 차세대 배터리 등 첨단 기술 협력을 관세 폭탄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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