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일타 강사 전한길 씨가 서울, 부산, 대구 등지의 대규모 집회에 등장해 연일 뉴스거리다. 그는 스스로 '상식파'라며, 2030의 마음을 대변하여 목이 터져라 나라 구하기에 진심이다. 국가가 망하면 가정도 직장도 없다며, 어떤 대목에선 울먹이기도 한다. 1974년 12월 동아일보 사태 이후 처음이라며, 백지 광고로 도배된 한 신문을 들고나와 "이러려고 민주화했나…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 얻은 게 고작 이것인가?"라며 묻기도 했다.
세상에 일방적인 건 없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소나기와 폭풍우도 잠시 한때, 일음일양(一陰一陽)의 교체가 있다. 그토록 떠들썩했던 내란 프레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래 끌면 밑천이 드러나고 지루하면 대중도 흥미를 잃는다. 적당한 시점에 새 흐름으로 갈아타고, 전진할 동력을 찾아야 한다. 선동과 술수, 허위만으론 한계가 있다. 대중을 설득할 논리와 철학이 뒷받침돼야 한다.
여론이란 출렁대는 물과 같다. 흐름을 이끄는 대중은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가 아니다. 잘랄루딘 루미의 시 '여인숙'에 나오는 "예기치 않은 방문객"이다. 그들은 집안 살림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는" 군중일 수도 있다. 대중의 힘이 지나치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사회가 몰락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1930년에 간행한 『대중의 반역』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대중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차이가 나는 것을 공격하여, 눌러 없애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인이 가진 '우리'라는 관념이 그렇다. 이것은 양날의 칼이다.
국난 극복 등에 도움이 되기도 하나 "우리가 남이가"처럼 어느 한 패거리만의 리(理)를 고수하려는 확증편향성에 빠지기 쉽다. 여기에 이념과 정치색으로 갈라치면, 좌는 우를 '토착왜구'라 부르고, 우는 좌를 '바닥빨갱이'라 불러 멸시한다. 끝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싹 쓸어버리려 한다. 얼마나 무서운 파시즘적 사유의 프레임인가.
오르테가는 좀 섬뜩한 말을 한다. "파시즘이 전개되면서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근거를 제시하거나 마련하려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태도를 취하는 유형의 인간이 출현했다. 여기에 새로움이 존재한다. 그것은 근거를 갖지 않을 권리, 곧 무근거의 근거이다."
'무근거의 근거'라니? 요즘 떠도는 말이 떠오른다. 새겨들어야 할 패러디이다. "헌재에는 헌법이 없고, 선관위에는 선거가 없고, 법원에는 법이 없고, 언론사에는 언론이 없고, 대통령실에는 대통령이 없고, 국무총리실에는 국무총리가 없고, 국방부 장관실에는 국방장관이 없고, 국민의힘에는 국민도 힘도 없고, 더불어민주당에는 더불어 줄 사람도 민주도 없다…."
이런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길 위에 우리는 서 있다. 패러디의 골자는 무엇인가? 명실상부해야 만사가 굴러가는데, 그런 알맹이가 '없다'는 말이다. "근거를 제시하거나 마련하려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 태도"가 만들어낸 '무(無)'의 정치 풍경이다. '무근거의 근거'에 탐닉해 가는 사회의 끝은 어디인가. 새로운 정권의 창출인가? 무정부의 혼란인가?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내부에서 이루어진 좌우 진영의 싸움을 "참된 마음으로 바라보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했던 사람이 있다. 위당 정인보다. 그는 수백 년간 조선의 역사가 오로지 "텅빔[虛]과 거짓[假]으로 전개된 자취"라 했고, 조선의 수백 년간 지속된 학문이래야 "오직 주자학 신봉뿐"이었고, 그 폐단은 '사영파'와 '존화파'라 요약한다.
사영파란 그 학설을 배워서 자신과 그 가족의 편의만 도모하려는 부류이고, 존화파란 그 학설을 배워서 중화의 문화로 뒤덮어 버리려는 부류를 말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것은 '속이 텅빈 학문'(허학)과 '거짓된 행동'(가행)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가리는 '실심'과 '실학'과 '실행'의 길을 찾고자 했다.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점잖게 토로한다. "내 감히 오늘날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에 겨워 넘쳐흐르는 눈물로 두 눈을 희미하게 한 채 내 시력이 닿는 대로 바라보건대, '합한다, 단결한다' 하더라도 파쟁은 더욱 격화되는 것 같더라."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을 쓸어 없애려는 사악한 기획에는 지식인이 동원된다. "모든 변화는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버나드 쇼의 말대로, 세상은 현자보다도 목소리 큰 과격한 미치광이가 멋대로 끌고 간다. '모리아'라는 '어리석은 여신'이 승리한다고 믿은 에라스무스의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아울러 각 영역의 전문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정신적 불행에 빌붙어 살아가는 '허위의 자격'을 가진 자라는 데카르트의 견해에도 동의한다. 허위의 자격이란, 사기 칠 허가를 받은 전문가를 말한다. 학자만이 아니다. 종교인, 정치인도 이에 해당한다. 데카르트는 여러 영역의 이론과 전문 연구에 "사기당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어떤 점에서 타당한가를 인식, 검토"하려 철학을 했다.
부정과 허위에 항거하기 위해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대중과 다수에 쉽게 끌려다녀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근거 없는 근거'가 판치는 사회를 부추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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