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는 남진과 함께 1970년대 대중가요계를 풍미한 쌍두마차였다. 두 사람은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경쟁자이면서 동반자였다. 이른바 '오빠부대'인 팬덤 문화의 신기원을 형성하며 일부 열성 팬들 간 물리적인 충돌까지 빚기도 했다. 하지만 후끈한 대결 구도에 가요계는 풍성했고 대중은 행복했다. 나훈아가 신화를 창조하면 남진은 전설을 기록하던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시대였다.
동시대의 가수인 남진과 나훈아는 닮은 듯 서로 달랐다. 스타일도 캐릭터도 다른 점이 많았다. 남진이 역동적인 목소리로 팝 스타일의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는 비디오형 가수였다면,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 모드에 꺾기 창법과 차분하고 애절한 음색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오디오형 가수였다. 남진이 산업화의 꿈이 어린 낭만적인 농촌을 노래했다면, 나훈아는 이촌향도의 서러움을 토로했다.
남진은 지금도 방송 출연 등 공개적인 외부 활동을 많이 하는 반면, 나훈아는 콘서트 외에는 공개 활동을 자제하는 신비주의적 칩거를 지향해 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상쟁(相爭)하면서도 상찬(相讚)의 태도를 견지하는 공존과 공생으로 대중가요계의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며 대중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에 부응했다. 싱어송 라이터로 많은 자작곡을 남긴 나훈아는 자긍심이 높은 가객(歌客)이었다.
최근까지도 카리스마 넘치는 위력적인 퍼포먼스 무대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자기 개성과 색깔이 분명한 노래를 불렀다. 일찌감치 고위급 인사나 재벌 그룹 총수의 초청도 부당하다 싶으면 거부했던 일화도 있다.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노래를 부른다'는 신념의 소유자로 이른바 '딴따라'로 부르던 가수에 대한 기존의 경박한 인식을 일거에 바꿔 놓은 것이었다.
나훈아는 노래를 통해서도 할 말은 하는 가요인이었다. 2020년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에서 부른 '테스형'도 그렇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소환하며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라고 일갈한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도 그랬다. 남진의 '님과 함께'가 이상적인 꿈이었다면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는 무게감 있는 현실적 서정이었다. 도시화의 그늘을 표현한 것이다.
부산 출신인 나훈아와 목포 출신인 남진의 영호남 대결 구도는 김영삼(YS)과 김대중(DJ)의 정치적 라이벌 관계를 연상시킨다. 나훈아와 남진이 악의의 경쟁이 아닌 선의의 경쟁으로 대중가요계의 발전을 견인했다면, 김영삼과 김대중이 남긴 우리 정치사에서 발자취도 그랬다. 저마다의 가치와 시각으로 동시대의 초상화를 그리며 민주화라는 시대정신과 국민의 정치적 갈증에 부응한 것이다.
남진, 나훈아 시대의 가요계에서도 팬덤 문화의 부정적 측면과 역기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비록 연예인이라지만 사생활 또한 마뜩지 못한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YS와 DJ 또한 부단한 시련과 도전의 정치 행로에서 파생된 명암(明暗)의 교차가 있었다. 그러나 남진과 나훈아의 존재가 한국 가요계의 축복이었듯이 YS와 DJ의 여정 또한 굴곡진 한국 헌정사의 위로였다.
민주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렇게 서로 닮은 듯 서로 다른 개성으로 공생의 경쟁 관계를 유지하며 선거를 통해 국정의 소임을 주고받는다. 동반자이면서 경쟁자이고 동지이면서 정적으로 한 시대를 동행하며 국리민복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준동한 내로남불과 적반하장의 시대는 YS와 DJ는 물론이고 나훈아와 남진이 경악할 악의와 저주의 사악한 정치 문화를 양산했다.
나훈아는 얼마 전 59년의 가수 인생을 마무리하는 은퇴 공연에서 작금의 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으로 양분된 국론과 망나니 칼춤의 정치판을 에둘러 비판했다. 왼팔과 오른팔을 들어 보이며 "왼쪽이 오른쪽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를 치고 있는데, 왼쪽 니는 잘했나"라는 일갈이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훈육 방식을 떠올렸다. 형제가 싸우면 둘 다 회초리로 때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국민의 죽비(竹篦)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나훈아의 이 은유적 비판을 두고 '오지랖 떨지 말고 입 닫으라'며 날을 세웠다. 반세기가 넘도록 온 국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팔순 노가객의 은퇴 공연 중 정치풍자 한마디에 쌍심지를 켜고 독설로 대응하는 협량의 정치가 차라리 측은하다. 상대의 전부를 타도와 박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공생의 경쟁이 아닌 공멸의 전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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