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정두나] 22년, 앞으로 또 몇 년

정두나 사회부 기자

정두나 기자
정두나 기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철 내부의 불이 꺼졌다. 화재를 알리는 경고음이 귀를 때렸다. 어리둥절할 시간은 없다. 재빠르게 의자 아래의 밸브를 찾았다. 밸브를 돌리자 가스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철 문이 열렸다. 스크린도어 역시 배운 대로 젖혀 열었다. 순식간에 매캐한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찬 지하철 통로가 보인다. 고개를 숙여 야광 스티커를 따라 빠르게 도망쳤다. 그제야 화재 상황을 가정한 '지하철 안전 체험'이 끝났다.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이유, 꼼꼼한 교육 덕분이었다.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는 대구 지하철과 똑같이 생긴 모형 내부에서 탈출 방법을 교육하고, 탈출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강사들은 탈출에 필요한 기구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탈출 레버는 어디 있는지, 혹시 대구가 아닌 다른 지역의 지하철에 탔을 때는 어디서 레버를 찾아야 하는지, 스크린도어의 모양에 따라 여는 법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방화 셔터의 문은 어디에 있는지 등등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할 수 있도록 거듭 설명을 거친다.

누구나 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쳤다.

가족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같은 사고의 반복을 막고자 유족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지하철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몰랐던 탓에 피해가 커졌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유족들은 탈출 방법을 교육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 덕분에 2008년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가 문을 열었고, 시민들은 지진이나 교통사고, 지하철 사고 시 대피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됐다. 그뿐만 아니다. 시트와 내장재가 불에 잘 타는 재질인 탓에 화재가 커졌다는 지적이 나온 이후, 전국에서 운행 중이던 지하철의 부품은 모두 불연재로 교체됐다.

유족들 덕분에 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갔지만, 대구시는 유족들에게 매정하다. 유족들이 마음 놓고 추모할 수 있는 추모 공간은 22년이 지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192명의 희생자를 함께 안치할 곳도 없고, 희생자의 이름이 적힌 탑은 '추모탑'이 아닌 '안전상징조형물'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받았다. 2월 18일마다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앞에서 추모식을 여는 것도 쉽지 않다. '대구시가 참사 추모 사업을 허락하는 대신 관광시설을 들이겠다고 한 약속을 어겼다'며 항의하는 상가번영회의 맞불 집회 탓이다.

여전히 대구시는 뒷짐만 지고 있다. 이들은 '수목장을 통해 희생자를 안치하겠다는 약속은 한 적 없다'는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상가번영회와 유족들 간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다. 추모식 당일 역시, 이곳저곳을 아무리 둘러봐도 대구시 관계자는 보이지 않았다.

유족들에게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물으니, 이들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놨다. 속상하지만, 내심 무섭다는 이야기였다. 점점 나이가 들고 있는데, 이대로 추모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쓰러질까 무서워하고 있었다.

구슬픈 추모곡이 맞불 집회의 트로트 가락에 묻힐 때, 유족들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참사 당시 꼿꼿했던 등은 이미 많이 굽어 버렸고, 덩치는 퍽 작아졌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유족들의 몸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이미 22년이 흘러 버렸다. 유족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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