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에 오지는 없다
입춘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시리다. 얼굴에 와닿는 바람에는 겨울이 한가득이라 봄이 올까 자못 궁금하다. 그래도 이 들녘에 끝내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이 땅에서 그토록 봄을 그리며 외쳤던 삼엄한 시절처럼.
영양으로 간다. 영양은 흔히 경북의 오지라 불린다. 예로부터 깊은 산골, 외진 산촌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영양 출신들을 두고 종종 쌀밥이 무언지 아느냐며 우스갯소리를 퍽이나 해댔다고 한다. 도시인에게는 길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며, 생필품 하나 사기 어려운 첩첩산중의 산골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외진 곳, 살기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오지라 단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일 뿐이다. 도시에 비해 덜 발전한 덕에 천혜의 자연을 온전히 품지 않았는가. 이제는 불편한 오지가 아닌 잃어버린 여유를 선사하며,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느리고 여유로운 사색의 터전이 아닐까.
국토를 에워싼 추위, 굽이굽이 골짜기에 얼기설기 엉겨 붙은 한기 서린 영양이던가. 그러나 거리의 인문학을 공부하는 내겐 한없이 그립고 고마운 땅이다. 조지훈 시인의 고향 주실마을과 한 폭의 그림 같은 자작나무 숲, 명성이 드높은 정원 서석지를 품은 땅 아닌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한없이 차오르는 영양이다.
그러나 이번 길은 아니다. 춥고, 시리고, 얼고, 터지고… 이 땅의 자유를 외치던 어느 어른을 뵈러 간다. 내가 닿고자 하는 집은 양반, 백성, 노비를 가리지 않고 기와, 초가, 띠 풀 움막을 상관하지 않는다. 세상 신분이나 구색은 허울일 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들의 '얼'과 '정신'을 키워낸 집, 그 집에서 한 시대를 살다 간 어떤 어른의 묵직한 말씀을 듣고자 함이다. 그러니 도시, 오지를 굳이 따질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

◆남자현 지사 동상을 보며
마흔여섯에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 땅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숨마저도 죽여야만 했다. 어금니를 물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지아비가 의병 전쟁에서 일제에 죽었다. 지아비의 생목숨을 끊은 것도 모자라 강제로 나라를 빼앗았다. 남편의 원수를 갚겠노라,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노라, 짓밟힌 땅에 꽃을 피우겠노라 다짐한 어른 남자현(南慈賢, 1872~1933) 이었다.
'남자현 지사 역사공원'에 도착하니 입구에 지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올곧은 기개가 느껴지는 섬세한 동상이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지사의 결연한 표정은 미동조차 없다. 동상을 마주하니 숙연함과 송구한 감정이 밀려온다.
동상은 사뭇 낯설다.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저고리와 쪽진머리에 비녀를 꽂고, 오른손엔 '독립원'이라 쓰인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여성 애국지사는 유관순 열사 외에 처음인 듯하다. 애국지사는 남성일 거라는 편협한 생각이 깨지는 순간이다. 동상을 돋아 올린 받침에는 "나는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돌아서려다 눈에 띈, 나를 눈물짓게 했던 건 지사의 왼쪽 손가락이다. 두어 마디 절단된 네 번째 단지를 보며 복받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일상에서도 애씀을 기억하며 기리는 게 후손의 도리일 텐데 국경일에만 '지사'를 찾고 추앙했던 게 부끄럽다.

◆집을 기다리는 집, 남자현 생가
역사공원 옆에 남자현 지사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돌담과 나무 기둥이 어우러진 솟을대문은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다. 그러나 대문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출입할 수 없다. 새벽부터 불원천리 마다치 않고 달려왔기에 생가 내부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담벼락을 경계한 언덕에서 생가의 마당을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지만 빈 마당으로 보이지 않는다. 묵직한 기운이 감도는 마당이다.
남자현 지사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듯도 싶다. 지사가 밟던 땅, 지사가 마주했을 하늘과 바람이 그대로 남았고, 숨결마저도 마당을 채우고 있다.지사는 이 집에서 안온한 삶을 산 게 아니다.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지만, 유해조차 이 땅에 명예롭게 묻히지 못했다.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를 일기로 하얼빈에서 사망한 후 국내 국립현충원에 가묘가 있을 뿐이다. 후손들이 유해를 찾으려고 수소문했으나 남강 외국인 공동묘지 자체가 사라진 뒤였다. 이후 유해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성사되지는 않았으나 지사가 마지막으로 결행한 투쟁은 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척결이었다.눈을 잠시 감고 애도했다. 이 나라 삼천리 강토가 지사의 집이고 무덤이 되기를.

◆목숨을 건 절박한 외침 "조선 독립을 원합니다!"
남자현은 전형적인 경북 양반 가문의 핏줄이다. 1873년 12월 7일(음력), 아버지 남정한과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조상들은 대대로 경상북도 안동 일직면에 살다가 조부가 영양에 이주하면서 정착하게 된다. 부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경북 혁신 유림과 교류한 선각자였다.
망국의 위기가 고조되자 경북의 유림들은 두문불출하지 않았다. 부친은 의병을 조직하거나 교육과 계몽 사업에 발 벗고 나섰다. 이런 부친의 의기와 유림의 정신을 직접 배우고 목격하며 남자현은 자랐다.
19세에 김영주(1871~1896)와 결혼했다. 김영주는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참극과 단발령에 항거하는 을미의병 항쟁에서 전사한다. 이 시기 경북의 많은 의인들이 의병 항쟁에 나서 목숨을 잃는다. 홀로 아들을 키우던 남자현은 국권 회복이 남편의 복수를 갚는 첩경이라고 믿으며 힘겹게 생계를 잇다 1917년 늦여름, 시어머니 탈상을 마친 후 마음먹고 있던 만주행을 결심한다.
남자현은 1919년 3‧1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후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서간도에는 경북의 어른인 이상룡, 김동삼 등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북 출신의 어른들은 서간도 일대에서 서로군정서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매진하고 있었다. 남자현은 이 어른들이 주도하는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독립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나는 부녀자요'라는 의식은 버린 지 오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몸을 사리지 않았다. 총독 암살, 독립운동 청원에 자신을 아낌없이 쓰고자 했다. 목숨을 건 의열 투쟁 선봉에 섰다. 두 번에 걸친 사이토 총독 암살 투쟁에 가담한 남자현이었다.1932년 만주의 정세가 격변한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을 세운다. 만주국은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아니다. 일제가 통치하는 식민지 괴뢰 국가였다.
국제사회가 들썩이자 1932년 9월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에 파견된다. 소식을 접한 남자현은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왼손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 쓴 혈서를 쓴 후, 절단된 손가락을 흰 천에 싸 국제연맹 조사단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목숨을 건 절박한 외침이었다.
◆길에서 이룬 큰 삶
세상 사람들은 흔히 남자현 지사를 '여자 안중근'이라 부른다. 단지 대장부의 기질로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를 썼기 때문에 그리 부른다면 이제는 달리 불러야 한다. 누구의 이름에 기대 불리는 것이 아닌 오직 '남자현 지사'로. '여성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라는 표현보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지사'로.
영양 들판을 거닌다. 어린 남자현이 디딘 땅이다. 영양 들판을 더 거닌다. 어른 남자현이 돌아오고 싶은 땅이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이다. 곧 있을 3·1절엔 이역만리에 묻힌 남자현 지사를 기릴 일이다. 부디 지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를 일이다.
생가 앞 들판에 봄이 아른거리는지 저만치에 선 버들개지에 물이 오른다.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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