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불사동(冬來不似冬). 겨울이 되어도 도무지 겨울 같지가 않다. '파릇파릇한 겨울'인 것 같다. 지구 온난화 탓인지 봄 같은 겨울의 자태가 곳곳에서 노출된다.
제주도 들판은 겨울에 더욱 파랗다. 놀고 있는 밭이 없다. 특히 지난 시절 제주도민을 먹여 살렸던 감귤, 멀리서 보면 환하게 켜진 전구 같다. 제주도 성산읍 신풍리는 국내 월동 무 생산량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다. 토박이들은 토종 무를 '놈삐'라 해서 무조청까지 해먹었다.
제주시 구좌읍은 월동 당근의 70%를 출하한다. 수확할 때 호미 대신 '비창'을 사용하는데 해녀들의 작업 도구가 밭작업에 이용된 케이스다. 육지의 비닐하우스에서 서둘러 출하되는 과일도 샘물처럼 솟구친다. 그리고 죽은 듯하지만 새파란 숨을 내쉬고 있는 겨울 움파의 뿌리로 무료한 입맛을 달래는 이들도 많다. 겨울에 더 짙은 향기를 더하는 냉이는 겨울이 봄철보다 더 인기다.
◆정체 불명의 월동초
특히 포항과 신안군 비금도의 재래종 겨울 시금치로 불리는 '포항초'와 '섬초'는 지리적표시제농산물 96호로 지정돼 보리와 함께 육지의 겨울에 포근한 방점을 찍어준다.
전업농부가 아니고서는 '월동초'(越冬草)의 속사정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다.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들나물을 '푸새'라 하고 무 배추 오이 등 심어서 재배한 채소는 '남새'라 한다. 그 경계를 파고든 게 바로 '유채'(油菜)이다. 일명 '시나낫빠'로 불리는 이 유채,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겨울을 넘긴다 해서 '월동초‧삼동초‧동초' 그리고 기름을 추출할 수 있다 해서 '기름나물'. 일반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건 시나낫빠의 어원이다. 유채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한국에서는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됐다. 한때 제주도 봄맞이꽃 1호로 불렸던 유채꽃도 바로 요놈이다. 분석하자면 '시나'는 중국의 다른 이름인 지나(支那), 낫빠는 일본어로 '잎채소'란 의미. 중국에서 들어온 잎채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소똥처럼 생긴 비결구형 배추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는 '봄동'도 헤갈리는 채소다. '겨울을 이겨낸 배추'라는 의미인데 어떤 이는 그 모양새를 보고 '봄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9월에 파종하면 초겨울, 10월에 파종하면 초봄에 수확하게 된다.
◆포항초를 찾아서
시금치는 중국 푸젠성 치근차이(赤根菜)가 우리나라로 들어와 '시근채'로 차용되다가 시금치로 자릴 잡게 된다. 시금치는 과일 못지않게 높은 당도를 가진 채소다. '월동초'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한다. 재배 지역에 따라 경북 포항은 '포항초', 전남 신안은 '비금초', 경남 남해에서는 '보물초'로 불린다. 11월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가 제철.
국내 시금치는 대개 두 가지 종자로 나뉜다. 봄에 파종해 여름에 먹는 종자는 서양계다. 병충해가 적고 더운 기후에 잘 크는데 대신 맛이 싱겁다. 여름에 먹는 시금치들은 다 이 종류다. 이와 달리 가을에 파종해 겨울에 수확하는 포항초·섬초는 모두 월동을 하는 동양계(재래종)다.
포항초의 재배 공간은 포항권을 커버한다. 칠포해수욕장 부근 곡강, 그리고 연입읍 시설재배단지, 대보면 구만리~대보리~강사리 나지막한 언덕빼기 등까지도 파고들었다. 호미곶의 바람은 제주도와는 질감이 다르다. 차지고 맛있는 바람이 종일 불어온다. 그래서 호미곶면으로 가면 구룡포권과 맞물려 벨트화된 과메기는 물론 보리와 시금치까지 한 세트로 체험할 수 있다.
◆포항초 문파
포항초는 얼추 356ha 재배면적에서 연간 4천915t 가량 생산된다. 포항초'에는 '처음'과 '시작'이란 수식어가 유난히 많이 붙는다. 시금치란 일반명사 대신 1980년대 초반 지역의 이름을 따 '포항초'라고 한 것도 처음이고, 시금치를 보기 좋게 단으로 묶어서 시장에 내놓은 것도 '포항초'가 처음이다. 또 대부분의 농가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생산을 시도한 것도 '포항초'가 그 시작이었다.
여러 문파가 있다. 호미곶에서는 '해풍시금치', 칠포해수욕장 근처의 '곡강시금치', 이밖에 청림동, 연일읍, 동해읍, 그리고 후발주자로 영덕 등에서도 출하된다.
포항초는 한때 '해도시금초'로 불렸다. 포항초는 단번에 표시가 난다. 영하 20℃ 이하로 내려가면 시커멓게 죽었다가도 햇볕만 쬐면 푸르게 생생해질 정도로 생명력이 대단하다. 일반 시금치에 비해 크기가 작으면서 뿌리 쪽이 붉은빛을 띤다.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적당한 염분이 더해진 탓이다. 또한 뿌리가 길게 자라지 못하고 떡배추처럼 옆으로 퍼지면서 영양이 뿌리부터 줄기, 잎까지 고르게 전해져 일반 시금치보다 당도가 높고 저장 기간도 길다. 이 종자를 다른 곳에 심으면 돌산의 돌산갓처럼 제맛이 안 난다.
1960∼1970년대 추억의 만화 주인공 '뽀빠이'는 위기에 처하면 시금치를 먹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근거 없는 설정이 아니다. 시금치에는 칼륨·철분·미네랄·비타민·엽산 등 영양소가 풍부한 탓이다.
◆포항초의 기원
포항초의 규모화된 재배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때부터 포항 송도해변에는 시금치밭이 지천이었다. 그 시금치밭에 포항종합제철소가 들어서면서 관계자들은 대체 농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흥해 곡강, 대보, 동해, 오천 등지로 옮겨갔다.
포항은 파종이 시작되는 9월 중순부터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겨우내 북서풍과 북동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영하 5~6℃를 유지한다. 또 바닷가 사질토라서 물 빠짐이 좋다. 동양계 시금치가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현재 포항초의 산증인은 여럿 있다. 구룡포읍사무소 근처 눌태리에서 6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포항초를 재배하는 오염준 씨, 흥해읍 곡강시금치의 산증인인 이등질 씨, 오창우 해풍시금치 작목반장 등이 리더격이다.
한동안 노지에서 재배됐지만 요즘은 비닐하우스 재배가 추세다. 찬바람에 잎끝이 노랗게 마르는 노지 시금치는 마른 잎을 떼 내는 손질 과정을 거쳐야 하는 데다 대도시 소비자들이 고운 시금치만 찾기 때문에 실내·외 온도 차가 덜한 비닐하우스 재배 방식이 선호되고 있다. 처음엔 곡강이 유명했는데 요즘엔 공단에 편입되면서 재배농가가 줄어들고 있다. 덕분에 노지만 고집하는 강사리가 포항초의 고향처럼 급부상하기도 했다. 강사리의 브랜드는 '해풍시금치'다.
영덕 영해읍 연평들판은 포항초에 도전장을 낸 '영덕초' 전진기지다. 1996년쯤 남쪽으로 100리 떨어진 포항 곡강에서 재배되던 포항초를 가져와 영덕 땅에 정착시킨 게 영해초다. 시중에서 간혹 '포항초(영해초)'로 표기돼 팔리는 이유다. 포항초와 경쟁하기 위해 묶음 띠지에 상표명(영해초)을 표시해 생산지를 밝히기도 했다.
◆섬초와 봄동
봄동은 땅바닥에 납작이 붙어 잎을 활짝 펼치고 자란다. 얼핏 보면 꽃처럼 생겼는데 엄연히 배추다. 너부데데한 모양 탓에 '납작배추·떡배추'라고도 부른다.
봄동은 비결구형 배추로 잎 여러겹이 둥글게 모아져 타원형으로 자라는 결구형 배추와 품종이 다르다. 속을 활짝 벌린 채로 노지에서 월동하는데, 시중 물량의 70%가 생산되는 진도는 한겨울의 강한 바람에도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얼지 않고 잘 자란다. 그 외 완도·해남에서도 질 좋은 봄동이 나온다.
이름엔 '봄'이 들어 있지만, 제철은 봄이 오기 직전이다. 봄동은 11월부터 출하되지만, 이듬해 1∼3월이 출하기다. 봄동은 한껏 잎을 펼친 채 자라느라 속잎까지 햇빛을 충분히 받아서 잎이 대부분 초록색이다. 가운데 잎이 노랗기도 하지만 일부러 골라서 살 필요는 없다. 속잎이 노래야 상품으로 치는 결구형 배추와 다르다. 이파리는 짧고 두꺼워 식감이 좋다.
며칠 전 집근 관문시장에 들러 월동 냉이와 포항초, 그리고 섬초, 물미역, 무 등을 사 갖고 와 요리를 해 먹었다. 겨울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다음 주자인 봄에게 뒤를 부탁한다. 그 순리를 계절은 단 한 번도 어기지 않는다. 선인들이 왜 위(胃)의 근원이 흙(土)이라고 했는 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wind30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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