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계엄령을 '계몽령'이라 한 것은 정치 발전까지 내다본 탁월한 정의 같다. 그런데 반발이 있다. 계몽은 구습을 벗어나자는 것, 정치적으로는 공화정을 하자는 것으로만 이해해 온 탓이다. 서구는 계몽주의 덕분에 시민혁명을 일으켜 공화정을 했다. 우리는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고 G8에 진입한 공화국이니 계몽령은 가당치 않다고 볼 수 있겠다.
공화국 주권자인 시민은 국방과 납세 의무를 지는 대신 '참정권'을 갖는다. 셋은 맞아떨어질 것 같지만 꼭 그렇진 않다. 3대 시민혁명으로 꼽히는 미국 독립전쟁은 셋의 갈등으로 일어났다. 식민지인 미국에 있던 영국인(미국인)은 납세 의무는 지지만 군에는 가지 않아도 됐으니 참정권은 갖지 못했다. 그런데 대영제국을 지탱하려면 많은 돈을 들여 군대로 식민지를 경략해야 했기에, 설탕세와 인지세를 만들어 식민지인에 부과했다.
그리고 차(茶)에도 세금을 매긴다고 하자 미국인이 분노해 폭동(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다. 영국 의회엔 미국인 대표(국회의원)가 없으니 영국 국회가 통과시킨 세금은 못 내겠다며 "대표 없이 과세 없다"란 주장도 했다. 시민군을 결성해 영국군과 싸워 이긴 이들은 제대로 된 로마식 공화정을 하자며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 국가를 만들었다. 납세와 국방 의무, 참정권을 일치시킨 것이다.
전두환의 단임 실천과 6월 항쟁으로 만들어 낸 '87체제'로의 이행은 도박이었다. 반공 방첩 입장에서 보면 '연좌제'의 전면 폐지였기 때문이다. 분단국가임에도 급격히 안보 해제를 한 것인데, 올림픽 호황과 냉전 종식 덕분에 국가보안법을 무력화해도 되는 대자유를 맞았다. 멸공 시절엔 상상할 수 없는 북방 정책과 남북 정상회담을 했고 기업과 K-컬처가 세계를 덮는 기적을 만들었다.
그늘도 자랐다. 3당 합당 덕에 보수의 장자가 된 김영삼이 젊은 피를 수혈한다며 병역의무를 하지 않은 운동권을 정치권(국회)에 영입한 것이 계기였다. 거의 동시에 연좌제에 걸릴 수 있었던 똑똑한 대졸자가 언론과 사법부, 행정부에 진출했다. 대학가의 스트레스가 풀려 나가자 시위는 블루칼라로 옮겨 갔다. 대학생과 달리 납세를 하는 노동자는 자기 권익을 위해 투쟁했는데,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로 이해했다.
이 구도 속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다. 2018년 5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몰래 이북으로 넘어가 통일각에서 김정은을 만났다. 김정은이 '북한 체제를 인정해 주면 비핵화를 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무조건 비핵화를 약속했다'며 미북 정상회담을 주선했다. 북한이 대한민국 공무원을 사살하고 태워 버렸을 때 그는 종전 선언을 발표했다. 안보의 나사를 크게 풀어 버린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영악했다. 중산층 이상에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그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서민 정책을 펼치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문 정권 재임 시절 아파트값은 37% 올랐지만 종부세는 1천여% 올리고, 종부세 대상자를 120여만 명으로 폭증시킨 것이 증거다. 그때부터 노동운동에 관대했던 중산층이 엄격해지고 이들의 노력으로 어렵게 정권교체를 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좌익을 척결하지 못하고 좌파가 친 '영부인 덫'에 걸려 22대 총선에 대패했다. 그리고 탄핵과 특검을 난비한 입법 독재에 대응한다며 계엄을 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 김진홍 목사가 입법·사법·행정부와 언론에 박혀 있는 숨은 좌파를 보라고 주장했다. 저들 때문에 누가 대통령이 돼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중요한 정치는 주권자가 직접 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 줬기에 중산층과 은퇴자들이 반탄(탄핵 반대) 시위에 나섰다. 여기에 기존 노조원만 위하는 귀족 노조에 막혀 일자리를 잡지 못한 20, 30대가 동참하며 지난 총선에 부정선거 요소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이 해킹한 것과 선관위에 비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감사원이 감사를 했는데, 국회는 그러한 감사원장을 탄핵하고 헌재는 이 감사를 중지시켜 버렸다.
숨어 있는 좌파의 위력을 절감케 한 것인데, 이것이 '한국판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자력으로 민주정을 키우지 못한 우리는 이제야 납세와 국방을 한 시민이 정치 주역을 하는 시민혁명을 맞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윤 대통령 탄핵과 무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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