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겨울,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매일 새벽 6시면 을지로 시립청소년도서관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도시락 두 개를 넣은 책가방을 들고서. 긴 줄을 따라 순서대로 입장하면서 이용료(50원이었나 100원이었나 혹은 더 됐을까)를 냈고 열람실에 들어가자마자 도시락을 꺼내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놓는 게 순서였다. 늦으면 찬밥을 먹게 될 터였다. 접근성이 좋은 학생들은 정독도서관으로 갔지만 나는 언제나 청소년도서관이었다. 내 인생 첫 번째 도서관은 책을 빌리고 책 냄새를 맡는 곳이 아니라 독서실 대신 가는 장소였다.
오랜 세월동안 도서관을 이용했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곧 사서에 대해 관심둔 적이 없었다. 사실이지 보관서고에 있는 책을 요청할 때를 빼고 일반 이용객이 사서와 부딪힐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 또는 정확히 어떤 것인지 범위와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일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사람들 덕분에 문제없이 돌아간다. 수전 올리언의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은 바로, 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1986년 4월 29일 아침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에서 불이 났고 40만 권의 책이 사라지고 70만 권의 책이 훼손되었다. 미국 도서관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작가는 그날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한 남자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과 그를 둘러싼 사적 담화를 씨줄로 하는 추리극을 연대순으로 펼친다. 흥미로운 건 전체 분량의 70%를 차지하는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의 역사와 역할과 사서들의 헌신을 담벼락처럼 둘러치고는 화재 이후 도서 복구와 도서관 복원과 용의자 색출 등의 후일담을 중정에 넣은 편집 구성이다. 그러니까 지루할 수도 있는 도서관의 역사가 대화재 사건을 만나 스릴러 형식을 띄게 되었다는 것.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에는 도서관에 대한 애정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이야기가 담겼다. 화재가 나고서야 알게 된 것들 예컨대 화재현장의 자원봉사자들에게서 얻은 깨달음. "그토록 짧은 시간에 시민들은 공유된 지식을 보호하고 전달하는 체계, 서로를 위해 우리 스스로 지식을 보호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도서관들이 매일 하는 일이었다."(53쪽)
"세네갈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예의 있게 표현할 때 그 혹은 그녀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말한다." (120쪽) 때문인지 독일 시인 하이네는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태워진다."고 경고했다. 거의 모든 전쟁은 책을 불태우고 인간을 태웠다. 1·2차 세계대전이 그랬고, 마오쩌둥의 문화혁명도, 캄보디아도, 이라크 전쟁과 보스니아 내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서관에 관한 기억과 책을 품은 마음까지 불태울 순 없는 노릇. 로스앤젤레스 도서관 복구에 모인 손길도 그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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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레터'에서 두 명의 후지이 이츠키가 마음을 주고받은 장소도, '영원한 제국'에서 비밀이 봉인된 공간도, '투모로우'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도 모두 도서관이었다. 즉 도서관은 온기를 나누고 비밀을 공유하며 안전을 보장해주는 장소라는 말이다.
"도서관에 관해 배우는 내내 나는 오래 남을 이야기를 들려주고, 지속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누군가가 내 책을 읽는 동안 살아 있고 싶은 이 모든 바람이 내가 이야기를 쓸 수 있게 하는 동력이었음을 깨달았다."(377쪽) 수전 올리언이 나를 깨운 경구, 알고 있으나 차마 내 입으로 말하지 못한 어떤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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