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위를 버리고 농사꾼이 된 남자
그 해 여름 나는 고대도시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아드리아해로 막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릴케를 떠올렸다. '한 번도 너를 붙잡지 않았기에 나는 너를 이렇게 확실히 가지고 있다네.' '말테의 수기'에서 어느 여가수가 부른 노래 구절이었을 것이다. 잔잔한 아드리아해 물결은 토파즈에서 에머랄드빛으로 보석처럼 바뀌고 있었다. '인생에서 행복이 불가능한 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부족하고 주의력이 산만해 주어진 무수한 부(富)를 잃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오한 이 편지 문구와 '두이노 비가'를 시인 릴케는 이 아드리아해 연안 어딘가에 있을 성(城)에서 썼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어떤 감당하지 못할 슬픔을 겪는 중이었고 그 핑계로 혼자 훌쩍 떠나 여러 나라를 풀씨처럼 떠돌고 있었다. 출발하던 날 아침,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에 넣은 책이 릴케의 시집이었는데 마침 여행 궤적과도 겹쳐 한껏 빠져들고 있던 터였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장미 가시에 찔려 숨져 간 그의 묘비에 새겨졌다는 이 유언은 도시 곳곳에 피어있는 장미의 내부를 자꾸 들여다보게 했다.
장미의 계절이었고, 이곳 스플리트는 자다르와 드보르드니크와는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나를 매혹시켰다. 시가지가 온통 로마 유적인 이곳은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로 지도에 기다랗게 그려진 달마티아의 중심에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에드워드 기번은 20년을 재위한 황위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이곳으로 돌아와 양배추 농사를 지었다는 한 남자를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로 다시 돌아와 달라는 청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불쌍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 호소를 물리쳤다. -당신에게 내 손으로 직접 심은 이 양배추를 보여줄 수 있다면, 당신은 즐거운 행복을 마다하고 권력을 다시 잡겠다는 생각을 버릴 텐데.' 그의 심정을 언뜻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스플리트는 아름다웠다.

◆황제가 된 해방노예
로마제국 17대 황제 콤모두스의 치세(180-192) 12년은 한마디로 재앙이었다.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철인황제(哲人皇帝)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었지만 폭정과 광기로 로마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 타락과 무능 때문에 신하들에게 암살된 후 그는 네로, 칼리굴라, 카라칼라 등과 함께 암군이자 폭군으로 로마사에 기록되었다.
이후 '여섯 황제의 해'와 '세베루스왕조'를 거쳐 18명의 황제(공동 황제까지 포함하면 26명)가 옹립되고 폐위되는 50년 군인황제 시대 또는 3세기의 위기시대(Crisis of the Third Century)를 연 주범으로도 박제된다.그 시대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군인들 중 많은 수가 왕위에 올랐고 또한 그들을 권력으로 이끈 같은 병사들의 손에 폭력적인 최후를 맞았다.

황제들의 평균 재위 기간이 2.7년 남짓, 제국 안팎이 평안할 리 없었다. 게르만족, 파르티아인, 고트족의 침략과 습격이 끊일 새 없었고, 내전과 안토니누스 역병(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추정)의 재창궐 등으로 제국의 경제력은 고갈되어갔다. 그 50년 혼란을 종식시킨 것이 284년, 43대 황제로 즉위한 해방노예 출신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로마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는 그가 비천한 출신임을 이렇게 기록했다. '혹자들은 솔론(스플리트 인근) 출생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서기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혹자들은 원로원 의원 노예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해방노예로 풀려난 명민한 그의 아버지가 서기가 되고, 옛 주인의 후원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인황제였던 카루스와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이 되었을 거라 사가들은 추론한다.
황제와 부하들에게 신망이 두텁던 그가 누메리아누스가 어두운 욕망을 품은 장인에게 살해당하자 추대되어 기나긴 군인황제 시대를 종식하게 된다.5현제 중 특히 아우렐리우스를 흠모해 적들과 동조했던 세력들까지 포용하고 등용했던 그는 쇠락한 로마를 잠시나마 부활시켰다.
통치 기간(284-305) 동안 기동대 위주로 군제를 개혁하고 강력한 전제정을 실시했다. 또한 사두정치 체제(Tetrarchia)를 구축하여 자신의 부하인 막시미아누스에게 공동 황제(아우구스투스) 직위를 주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를 각각 양자로 삼아 부황제(카이사르)로 임명해 동로마와 서로마를 통치했다. 20년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지만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과 그리스도교를 적극 박해한 황제여서 각광받지는 못했다.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도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재위 20년이 되던 해인 305년 스스로 직위에서 물러나 313년 사망할 때까지 스플리트에서 지냈다. 로마 제정이 성립된 후 사두정시기까지 자진 퇴위한 황제는 사실상 그밖에 없었다. 스플리트에 지어진 그의 궁전은 바다를 향하는 두께 2m, 높이 22m의 벽과 북쪽을 향하는 높이 15m의 벽으로 거대했다.
원래 이 궁전에는 4개의 성문과 16개의 탑이 있었다는데 현재 3개의 탑만이 남아 있었다. 이 궁전 안에서 그는 양배추 농사를 지으며 일개 로마시민으로 살았다.스플리트는 이 궁전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615년 아바르족이 침략했을 때 주민들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이 궁전을 피신처로 삼아 자신들의 집을 짓고 스팔라툼이라 불렀다.
이로써 현재까지 그리스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반씩 섞인 과도기적 로마 시대 궁전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마치 로마 시대 야영지처럼 네 개의 길이 중앙에서 만나도록 설계되었고 내부와 외벽의 거대한 아케이드에는 작은 상점이 즐비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는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으로 바뀌었는데 프레스코화와 대리석으로 만든 설교단,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물로도 유명하다. 주피터신전은 세례당으로 바뀌었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종탑이 옆에 서 있다. 크로아티아의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이었던 듯한데 지하 광장 아주 음습한 곳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흉상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아직도 그다지 인기가 없어 홀대를 받는 느낌이라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죽기 얼마 전쯤 아내와 외동딸이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재산이 몰수되고 추방당한 걸 막지 못한 걸 보면 의외로 권력의 속성과 사람의 심리에 지나치게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었겠다 싶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녀의 죽음이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의 일이었고, 뒤를 이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 복수를 대신 해주고, 그가 실시한 정책을 거의 대부분 그대로 계승했다. 훗날 무너지던 대제국을 재건하여 천년을 더 지속시키는 큰 업적을 남긴 황제로 평가받기도 하니 또 그나마 다행인 것인가.
이 사실에 빗대어 릴케의 두이노 제 1비가 '누구냐, 나 울부짖은들, 어느 천사가 있어 내 울음에 귀 기울여 준단 말이냐.'에 우울해 하다가 '사람의 운명이 제 아무리 비참하고 고독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결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란 구절에서 잠시 한숨을 내쉰다.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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