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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현장-김성우] '숯의 화가' 수구초심(首丘初心)

김성우 경북부 기자
김성우 경북부 기자

얼마 전 김하수 청도군수가 모처럼 '숯의 화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배(69) 작가를 만났다. 이날 두 사람의 만남에서는 청도출신 문화예술인의 근황이 화두가 됐다.

김 군수는 "청도 출신인 이배, 박대성 등 걸출한 미술인을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이 작가는 "김 군수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한다"며 "앞으로 구체인 계획이 마련되면 자신이 직접 세계적 건축가의 힘을 빌리는 등 적극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화답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통하는 이 작가는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출신이다. 정월대보름날인 지난 12일 오후 5시, 이 작가가 어릴적 멱감고 놀던 청도천에서 개인전 프로젝트의 마지막 여정인 '달집태우기' 피날레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전시로 지난해 11월 폐막한 개인전의 마무리였다. 1년 전 정월대보름 이곳에서 달집태우기로 시작해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향했던 전시는 1년 만에 다시 청도로 돌아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작가는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고향의 민속 행사인 달집태우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는 베네치아의 전시를 폐막하고 전시장에 설치됐던 '붓질' 작품과 도배지를 모두 뜯어 고향인 청도로 갖고 왔다. 청도천 하중도(섬)에 뱀의 해에 뱀을 형상화한 길이 200m, 폭 35m에 달하는 작품으로 달집을 만들고, 태우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다.

1989년 가을, 이 작가는 편안한 교직 생활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족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극심한 생활고로 먹을 것이 없어 원형탈모증까지 생길 정도로 궁핍했다.

하지만 30여년 동안 '숯'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새로운 미술장르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손이 숯으로 형편없어질 무렵, 이 작가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프랑스 파운데이션 브랑카에서 한국 작가로는 이우환에 이어 두 번째로 개인전을 여는 등 지금까지 파리(20회), 뉴욕(5회), 유럽(이탈리아·독일·벨기에), 한국(29회)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 2023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채널가든 광장에 한국 작가 최초로 6.5m 높이의 대형 숯 덩어리 조각을 설치해 주목받았다.

청도 모계중학교 출신인 이 작가는 모교 사랑에도 주저함이 없다. 지난해 1월 모교에 거금 3억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학교는 작가의 뜻에 따라 '문곤이배장학회'를 설립하고 매년 2천여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장학회의 명칭은 이 작가의 학창시절 미술교사였던 문곤(2001년 작고) 선생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화가의 꿈을 이룬데서 비롯됐다. 당시 문 교사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이 작가에게 사비를 털어 학비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2019년 자신의 주옥같은 작품 6점을 모교에 영구 기증했다. '신체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작가의 기질과 개성, 재능을 결정하게 된 고향 땅 청도의 기억을 오롯이 담고 있다.

또한 작가는 2023년 청도박물관 개관 10주년 행사인 '어느 화가의 고향으로 초대' 특별전을 통해 자신의 소장 미술품 124점을 기증했다.

어렵게 수학하던 프랑스 파리 시절, 그 흔한 물감 살 돈이 없어 대신 헐값에 숯 한 포대를 산 것으로 시작된 그의 뜨거운 예술혼은 '죽을 때라도 자신의 근본과 고향을 잊지 않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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