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맞춤복 브랜드인 이노센스(INNOCENCE)의 대표 천상두 디자이너는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으로 45년 동안 디자이너 길을 걸어왔다. 1981년 옷 가게 'Mr.천' 오픈으로 시작된 그의 패션 인생은 그야말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대구 유수의 패션쇼에 여러 차례 초청되고 지금도 매해 해외 패션쇼를 열 정도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개성을 옷을 통해 마음껏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천 디자이너를 지난 20일 대구 중구 대봉동에 있는 그의 브랜드 매장 '이노센스'에서 만났다.
-지난해 연말, 누구보다 바쁘게 지내셨다. 한 달 동안 패션쇼만 두 개를 열었다고.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 서울에서 한 번, 대구에서 한 번. 이렇게 두 개의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쇼에 한 번 소개한 옷은 절대 다시 올릴 수 없으니 평소보다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11월 1일에는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디너 패션쇼를 했는데 그건 전국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연합해서 하는 패션쇼였다.
같은 달 15일에는 데뷔 45주년 패션쇼 '더 마스터프스'를 열었다. '더 마스터프스'는 '한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명장들이 만든 작품'을 뜻한다. 내 이름을 걸고 탄생시킨 여성복 브랜드 '이노센스(INNOCENCE)'의 작품 75점을 무대에 올렸다. 이노센스의 트레이드마크는 양복이다. 딱 떨어지는 양복에 자수나 곡선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 이노센스만의 스타일이다.
-45주년 패션쇼라니 감회가 남다르겠다.
▶패션쇼가 끝나면 눈물밖에 안 나온다. 20분 정도 걸리는 무대를 위해 6개월 동안 달리는 거기 때문에 그게 끝나면 허무함이 밀려온다. 쇼가 끝나고 10일에서 15일 동안은 쇼에 관한 생각은 전부 잊어버린다. 자꾸 곱씹으면 아쉬움과 후회만 남더라. 지인들과 놀면서 휴식을 가졌다.
지금은 다음 패션쇼를 준비 중이다. 나에게 옷은 영감을 형상화한 예술 작품이다. 3월의 잎사귀 색이 다르고 4월, 5월의 색이 다 다른 것처럼 시기별로 내게 찾아오는 영감도 다르다. 공장처럼 옷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스케줄 없이 움직인다.

-45년 동안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다지면서 다양한 활동도 하셨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경험과 실험으로 45년 디자이너의 길을 무사히 걸어올 수 있었다. 그간 지역에서 열리는 다양한 패션쇼와 오사카컬렉션, 경북패션이노베이션, 부산패션위크 등의 패션쇼에 참여했다. 지금도 일 년에 두 번은 중국에서 패션쇼를 연다.
경험으로 쌓은 실력을 감사하게도 인정해주셔서 경북외국어테크노대학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 대구경북패션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45년 디자이너 인생의 시작이 궁금하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어린시절이 있었다던데.
▶옷을 그냥 입지 않고 새롭게 리폼해 입기를 좋아했다. 고향이 경북 의성인데, 당시 집에 값비싼 재봉틀이 있었다. 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반짝반짝한 먼지떨이의 털을 입고 있던 청바지에 붙이면 재밌을 것 같더라. 어머니한테 재봉틀 쓰는 법을 배워서 바지 허벅지 부분에 먼지털이로 리폼을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사는 친한 친구에게 이걸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거다. 마구 달려가서 보여줬더니 친구가 정색을 하면서 온갖 욕을 하더라. 그게 오랜 시간 아주 큰 아픔으로 마음에 남아있었다.
-보통 어릴 때 그런 일을 겪으면 풀이 죽어서 못 하기 마련인데.
▶물론 친구의 반응이 속상했다. 한편으로는 완성된 옷을 보니까 기분 좋은 수준을 넘어서 황홀하기까지 하더라. '옷'이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내 정체성이 될 수 있다고 느낀 거다. 그 강렬한 기억이 군 제대 후 25살에 대구 비산동에 '미스터천'이라는 옷 가게를 열게 했다.

-대구에 유니섹스를 처음 들여왔다고 들었다.
▶요즘엔 유니섹스 스타일이 아주 흔하지만 1980년대 대구는 성별에 따라 옷 형태가 고정돼 있었다.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다. 1984년에 대구백화점 맞은편에 매장을 열고 유니섹스 스타일을 대구 최초로 선보였다. 남들 다 하는 건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다른 가게가 마네킹을 사용하길래 나는 낚싯줄로 대나무를 엮어 사람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옷을 디스플레이해놨었다.
그때만 해도 너무 튀니까 손님도 없고 손가락질도 받았다. 당시 배우 엄앵란 씨가 대구에 살았는데, 대나무 마네킹이 있는 쇼윈도를 보면서 '감각이 남다르다', '잘 될 거다'라고 칭찬을 하고 가셨다. 나만의 스타일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힘이 됐다.
-제일 자신 있는 건 '양복'이라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 거주 중이었던 가수 계은숙 씨의 초대로 일본에 처음 갔다. 백화점에 갔는데 세계 온갖 명품들이 다 있더라. 정말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명품처럼 세련된 옷을 만들고 싶어서 아르마니 정장을 사 온 뒤 옷을 모두 분해하고 분석했다. 나는 비전공자였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듯 접근한 거다.
바느질 간격부터 디자인, 재봉 방식 등 세세하게 다 공부하고는 동양인 체형에 맞게 나름의 방식으로 천상두만의 양복을 만들어냈다. 5년 동안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몰두한 결과다. 지금도 대구에서 이노센스의 양복을 따라오는 디자이너는 없다고 자부한다.
-백화점에서는 이노센스 브랜드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아쉽다.
▶일단 이노센스는 맞춤복 전문이다. 매장에 걸려있는 옷들 보면 단 하나도 같은 게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게 찾아오는 영감을 100% 옷에 실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노센스의 옷은 팔리는 게 중요하지 않다. 내 예술성을 얼마나 드러냈느냐가 관건이다.
반면 백화점에 입점하면 판매량이 중요해진다. 수익을 내야 백화점도 그 공간을 내어주지 않겠나. 그건 내가 추구하는 본질과는 다르다. 이노센스는 옷을 예술로 대하는 손님을 환영한다. 난 지금도 내가 만든 옷을 귀중품 다루듯 정성스럽게 만지고 대한다.
-요즘은 자라, H&M 같은 SPA브랜드가 패션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 대량으로 생산해서 값싸게 파는 이런 브랜드에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추세다.
▶SPA브랜드의 디자인은 카피에 가깝다. 옷에 어떤 패턴을 넣어 디테일을 줄 건지, 어떤 부자재를 사용할 건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고 남들이 이미 고안해 낸 디자인을 베껴서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식이다. 유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 오래 입기도 힘들다. 오래 입는 걸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타깃이 정확한 옷은 좋은 옷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0대를 위한 패션, 40대를 위한 패션이라고 구분 짓지 않나. 정말 좋은 옷은 30년이 지나도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그래서 이노센스에는 딸과 엄마, 며느리들이 함께 온다.
-유행에 따라 옷을 사니까 몇 년 입고 버리게 되더라. 옷을 오랫동안 잘 입는 팁도 있을까.
▶우선 좋은 원단을 사용한 옷이어야 한다. 난 울을 제일 좋아한다. 가볍고 얇아서 몸에 착 감기는데, 또 따뜻하다. 단점은 보풀이 잘 생긴다는 거다. 그렇다고 보풀을 제거하면 천이 해진다. 어쩔 수 없다.
다음으로는 코디를 잘 해야 한다. 한 벌 사서 열 벌로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옷 하나를 살 때 집에 있는 다른 옷들이랑 다양하게 매치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도전해야 안목이 생기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옷을 입을 수 있다. 그게 옷을 잘 입는 거다. 전국적으로 옷을 잘 입는 도시가 서울 다음 대구라서 큰 걱정은 없다.(웃음)
-옷을 매일 같이 만드느라 이노센스 건물 안에만 계신다고 들었다. 대구에서 평생 살았지만 대구 지리도 모를 만큼 작업실에 사시기로 유명하시던데, 요즘도 옷을 매일 같이 디자인하고 만드나.
▶패션쇼 끝낸 후 10~15일 휴식 시간을 갖는 것 외에는 작업실에 상주한다. 휴식도 작업실에서 하는 편이긴 하다. (웃음) 요새는 1950년대 디올 풍의 옷을 만들고 있다. 허리가 가늘어 보여서 인기가 좋다. 유행은 돌고 돌기 때문에 과거 유행했던 옷을 공부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1950년 대 스타일북을 구해서 공부하고, 거기에 2025년 나만의 스타일을 더해서 봄, 여름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3월에 또 패션쇼를 앞두고 있다.
▶3월 28일 수성 아트피아에서 패션쇼가 열린다. 2025년 S/S 시즌 옷들이 공개된다. 패션쇼의 주제는 'Hope(희망)'이라는 의미로 '호페라'로 정했다. 새싹이 돋아나는 봄 시즌 옷인 것도 있고, 요즘 정치적으로도 소란한 대한민국에 희망이 돋아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댓글 많은 뉴스
홍준표 "조기 대선 시 시장직 사퇴…내가 집권하면 TK현안 모두 해결"
[단독] 국가보안법 전과자, 국회에 몇 명이나 있을까?
한동훈 "기꺼이 국민 지키는 개 될 것"…이재명 '개 눈' 발언 맞대응
김병주, '尹 참수' 모형칼 들고 활짝…논란되자 "인지 못했다" 해명
尹 대통령 지지율 48.2%…국힘 43.5%·민주 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