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유라시아 세계질서와 연동된 위만조선의 역사와 멸망

기원 전후 만주 지역의 국제환경…위만조선, 한, 흉노라는 3각 구도
주변 소읍들 항복받고 영토 확대…무역 활발, 모피 가공업도 발달
서해·남해안 日열도까지 항로망

산해관.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산해관.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만리장성.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만리장성.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제공.
값비싼 모피. 담비.
값비싼 모피. 담비.
경주 죽동리 동복 오로도스형.
경주 죽동리 동복 오로도스형.
고조선 별도끼(춘성 신매리 출도. 국립박물관)
고조선 별도끼(춘성 신매리 출도. 국립박물관)
대구 비산동 동검 오로도스형.(국보 137-1. 호암 소장)
대구 비산동 동검 오로도스형.(국보 137-1. 호암 소장)
오론촌 박물관 내몽고 이맹지구 위진.
오론촌 박물관 내몽고 이맹지구 위진.
잔무늬거울 복원품(한성박물관)
잔무늬거울 복원품(한성박물관)
홍마노 구슬(부여, 모알산묘지. 길림박물관)
홍마노 구슬(부여, 모알산묘지. 길림박물관)

최초로 알려진 우리의 민족국가의 명칭은 '조선'이다. 최초의 문헌 사료는 중국의 '관자(管子)'이고, '사기', '한서', '후한서' 등에도 '조선'이 기록됐다. 우리 기록은 뒤늦지만 '삼국유사'는 '고조선' 또는 '왕검조선'으로 기록했고, '제왕운기'는 후조선(위만조선) 이전의 조선을 '고조선'으로 불렀다. 하지만 기록의 유무와는 관련없이 늦어도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서 생활권, 주민들, 문화권, 정치권을 고려하면 역사공동체가 성립됐다. 그리고 도시국가들(소국)을 거쳐서 요서·요동·길림·대동강 유역 4개 지역을 중핵으로 한 '하(夏)'나 '은(殷)'처럼 도시국가연맹 같은 형태가 됐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 중국인들의 필요성, 지리적 인식, 역사적 상황에 근거해서 요서와 요동지역의 정치체들을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처럼 문명이나 질서를 지칭한 것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조선이란 정치체의 마지막 단계인 위만조선의 실체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때 한민족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전에 가담했고, 건국과 멸망의 과정이 유라시아 세계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연결됐다. 또한 최초의 민족적인 패배를 했고, 그 결과 정체성 및 자주성과 직결된 '한사군' 등의 문제들이 발생했다.

◆위만조선의 건국

위만조선이 건국됐을 때는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정치 질서와 문명의 대결이 시작되는 시대였다. 따라서 과정이 매우 역동적이고 복잡하다. 기원전 4세기 말 중국 지역은 이른바 '전국 시대'의 말기였다.

기원전 318년에 '흉노(匈奴)'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초원에서 거주하는 전형적인 유목문화 집단인데, 알타이 산록의 스키타이 계통 문화와 연관이 깊다. 그런데 서기전 307년에 조나라의 무령왕이 흉노를 모델로 삼아 유목적인 군사시스템을 채택했다.

유목집단들이 중국 질서에 본격적으로 관여를 시작한 증거이다. 이 직후에 화북지역의 연나라는 산동지역의 제나라 도움을 받아 발해만의 해양소국인 고죽국 등을 격파해 발해만, 요서 지역을 차지했다.

장군인 진개는 국경을 접한 조선을 공격했다. '삼국지'에는 '위략'을 인용하여 조선의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국경선이 동쪽으로 이동해 만번한(滿番汗)이 됐다고 기록했다. 반면에 '사기' 흉노열전이나 '염철론'에는 동호를 공격하여 1천 리를 빼았고, 그래서 동호는 약해졌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시대 상황이나 문장의 내용을 고려하면 동일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동호와 조선이 동일한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그 후인 기원전 221년에 진나라의 시황은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통일시켰다. 그는 기원전 215년에 10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흉노를 공격하여 오르도스(Ordos·황하 이남과 동몽골 지역)을 장악하였고, 감숙 지역에서 발해만까지 소위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는 바다를 순수하는 '순해'를 네번 했는데, 세번이 발해만 지역이었다. 전략적으로 중요시한 증거다. 진나라는 기록처럼 '북쪽에서 호(胡)와 맥(貊)을 내쫓았고, 남쪽으로는 월족(越族)들을 정복하였다. 그렇다면 '호'는 '흉노'이고, '맥'은 조선이지만 동쪽의 '호'라는 의미의 일반명사인 '동호'일 가능성이 크다. 동호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담당자이며,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한 집단이다. 또한 동호가 붕괴하면서 후예로 기록된 선비계와 거란이 포함된 오환계는 부여, 고구려와 언어가 통했다는 내용의 기록들이 있다.

서기전 210년에 진시황제가 사망했고, 이 무렵에 조선에서는 '부(否)'가 왕이 됐다. 그리고 다음 해에 흉노에서는 '묵특(冒頓)'이 2대 선우로 등장해 오로도스 지역을 수복했다. 이 때 동호가 묵특에게 강압적인 태도로 천리마를 요구했고, 뒤 이어 선우의 부인들인 연지(閼氏)중 한 명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국경 사이인 1천여 리의 빈 땅을 요구했다. 그러자 묵특은 기다렸다는 듯 동호를 급습해서 멸망시켰다. 이어 묵특은 현재 감숙성에 근거지를 두고 실크무역을 통해 강력했고 오랫동안 흉노를 억압했던 '월지'를 공격하여 서쪽으로 추방시켰다.

서기 전 206년에 이르러 한나라의 고조는 다시 중국 지역을 통일했다. 몇 년 후에는 32만의 친정군으로 흉노를 공격했으나 백등산 전투에서 대패했고, 이후 한나라는 60년 동안 흉노에게 엄청난 조공을 받치며 굴종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염철론'에는 그 무렵에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땅을 겁박했다고 기록했다. 국제질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시대상황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성이 위(衛, 魏)로 알려진 '만(滿)'이라는 인물이 1천여 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국경의 패수를 건너 조선땅으로 망명해왔다. '사기'에는 그가 연나라 사람이고, 상투와 오랑캐 옷을 입었다고 했다. 조선의 준왕은 그에게 '박사'라는 직책과 100리 땅을 주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위만은 신속하게 세력을 확장했고, 결국은 난을 일으켜 조선을 무너뜨렸다. '위략'에는 그가 한나라가 쳐들어온다고 거짓보고를 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94년에 속칭 '위만조선'이 세워지고, 도읍이 '왕험성'에 정해졌다.

그러자 조선의 왕인 '준(準)'은 탈출해서 금강 하구로 추정되는 마한(韓地)의 목지국(또는 건마국)으로 들어가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也 自號 韓王 ……').

준왕의 집단이 뱃길을 이용한 것은 출발 장소가 육로로 연결된 가까운 한반도가 아니라는 반중이다. 또한 한반도의 남쪽 해안까지 가서 정착한 이유는 대동강 하구나 경기만 일대에는 수 많은 유적들이 보이듯 다른 정치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기원 전후에 만주 지역의 국제환경은 조선(동호?)과 진, 흉노, 월지라는 '4각 구도'에서 위만조선, 한, 흉노라는 '3각 구도'로 변했다. 한편 한반도는 대동강 유역의 정치세력과 '부'가 건국한 목지국(건마국)을 중심으로 한 삼한의 공존체제가 됐다. 이러한 격변의 파고 속에서 일부 주민들은 일본열도로 건너가 소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위만조선의 성장

위만조선은 빠르게 성장했다. 동아시아의 역학관계, 나아가 유라시아 동쪽 전체의 질서판이 바뀌는 상황과 연동됐고, 그 변동의 주체는 60여 년 동안 흉노에 굴욕을 당해온 한나라였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등장한 한무제는 40여 년 동안 흉노에게 공격을 가했고, 결국은 남흉노 북흉노로 '분할지배(devide and rule)'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서쪽으로는 장건을 중앙아시아 동쪽까지 파견해 흉노를 압박하는 포위외교를 시도했다. 비록 외교적인 목적은 실패로 끝났지만, 대신에 오아시스 실크로드로 진출할 수 있는 정보와 경험 등을 얻고, 무역망을 확장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기원전 112년에 양복에게 수군 10만 명을 주어서 광동(廣東), 광서(廣西), 베트남 북부지역에 있었던 강국인 '남월(南越)'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진나라를 이어 동남아시아,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무역망을 구축했다. 이른바 해양실크로드를 확장한 것이다.

한무제는 다음 단계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 중국의 지정학적인 환경을 고려하여 동쪽으로 팽창을 시도했다. 동아시아는 3핵 체제로 구성되었다. 중국세력, 북방의 유목세력, 요동을 포함한 동방세력이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통일한 세력은 군사력이 뛰어났고, 식량창고로 알고 공격해 오는 북쪽의 유목세력과 투쟁해야 했다. 따라서 배후이며 역학관계의 pivot 역할을 하는 동쪽 세력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거나 복속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제압해야만 했다. 이는 수나라도, 당나라도, 요나라도, 명나라도, 청나라도, 6.25때 중공도 마찬가지였다. 위만조선은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있었지만, 질서가 급속하게 변동되는 상황에서 국력을 강화시켰고, 군사력 또한 급격히 신장했다.

한 집단의 정체성을 논하거나 찾을 때 기본적인 자세는 '백성이 주체'라는 인식이다. 고조선은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체가 불분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따라서 구체성을 띈 생활을 알아야 한다.

고조선은 제련술과 제철술 등 금속산업이 발달했다. 위만조선의 핵심 공간이고, 왕험성의 후보지인 고구려의 요동성과 안시성(해성) 지역은 동아시아 최대,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또한 요서 지역은 요하문명의 핵심인 홍산문화가 발달했는데, 옥제품들은 요동의 서쪽인 '수암(岫岩)'이 원산지였다.

또한 섬유산업이 발달했는데, 고조선과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시 일대의 서단산 문화를 '천잠명주(天蠶絲綢)문화' 라고 부를 정도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축산업을 장려했고, 특히 목마산업이 발달해 수출을 했다. '사기'에는 위만조선의 우거왕이 태자에게 군량미와 함께 5천필의 말을 한나라에 보내도록 시도한 내용이 있다. 그 시대에 말은 값비싼 전략 물자였다. 흉노식 동복이나 간두령 등의 유물들을 보면 위만조선은 기마군단을 운영했을 것이이다.

무역이 활발했고, 모피 가공업도 발달했다. 북한사학은 기원전 2세기에 고조선이 단궁(화살), 돈피, 문피(표범가죽), 과하마 등과 반어피(바다표범)까지도 한나라에 수출했다고 주장한다(홍희유 '조선상업사, 고대·중세'). 일종의 중계무역까지 한 증거이다.

화폐를 사용했으므로 고조선의 영역에서는 연나라 화폐로 알려진 명도전이 20여 군데에서 발견됬다. 진나라의 반량전, 한나라의 오수전 등의 화폐들은 제주도에서까지 발견됐고, 일부는 일본열도에서도 발견됐다. 북한에서는 고조선도 일화전, 명화전이라는 화폐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무역권의 범위가 넓었고, 상인들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증거들이다.

위만조선은 '사기'의 기록에서 나타나듯 주변 소읍들의 항·복을 받고, 재물 등을 얻고, 영토를 확대했다.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이 있다. 원조선과 위만조선은 해양활동이 활발했다. 요동만에서 압록강 하구의 서한만을 거쳐 대동강 하구 경기만, 서해안, 남해안을 통과해 일본열도까지 이어지는 항로망을 이용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지역들이 발해만과 산동지역으로 연결되는 길목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과 동아시아의 역학관계속에서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결국 기원 전 108년에 '조한 전쟁'이 발발했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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