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이 열리는 날은 축제였다.
장이 서는 '장날'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잘 다려 놓은 빳빳한 양복을 갖춰 입고 이른 아침 장터로 나갔다. 설날이나 추석을 앞두고 서는 '대목' 장날은 근동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온 듯 인산인해로 북적거렸다. 굳이 꼭 사야 될 생활필수품을 사야 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장터에 나가 장을 보러 온 친구를 만나 십년지기를 만난 듯 새벽부터 펄펄 끓여낸 장터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는 재미를 즐겼다.
낮술 한 잔에 불콰해 진 아버지는 '안동간고등어'나 영덕문어 혹은 서해안에서 잡은 '영광굴비' 한 두름을 사서 삽작문 밖에서 '에험'하며 기침을 하곤 했다. 그래서 장날 직후 며칠간 아버지의 밥상은 풍성해졌다. 오일장은 그런 아련한 우리시대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기억의 원천이다. 그래서 전국곳곳의 오일장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기억을 소환하는 선산오일장
2,7일에 열리는 선산오일장은 경상북도에서는 김천, 상주장과 더불어 가장 큰 오일장이다. 주말이나 대목이 낀 날에 열리는 오일장은 장터골목을 빠져나가는 데만 1시간이 걸릴 정도로 인산인해다.
선산에는 조선 초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까지 현재의 선산문화회관 앞에서 단계교에 이르는 현재의 선산읍 중심가에 장터가 형성됐다. 이곳은 선산읍행정복지센터와 '선산객사(善山客舍)'를 비롯한 관공서가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선산의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1963년 이후에는 수문교에서 지금은 사라진 서울예식장에 이르는 거리에 장이 서다가 그 자리에 1993년 현대식 공설시장인 '선산봉황시장'이 들어서면서 선산5일장은 봉황시장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선산읍성 '낙남루'에서 단계교까지 이어지는 약 2km에 이르는 복개천으로 이전했다.

물론 지금의 5일장이 과거 아버지세대 장날의 풍요롭고 정겨운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5일장을 찾아다니는 '장돌뱅이'들의 독무대가 된 듯한 시골오일장이지만 그래도 장터에 가면 직접 기른 채소와 콩과 팥 등의 농산물을 직접 들고 나와 좌판을 벌인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고 간혹 가보처럼 간직해 온 골동품들을 만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요즘같이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날에는 파릇파릇한 봄을 먼저 만끽할 수 있는 묘목이나 화분 모종들이 장터 입구에서 반기기도 한다.
선산오일장은 봉황시장과 이어진다. 상설시장 안에는 장을 보느라고 허기진 시장기를 달래 줄 장터국밥이나 돼지국밥을 잘하는 식당들이 꽤 있다. 선산시장에선 꽤 유명한 한 국밥집 앞에는 길게 웨이팅 줄이 서 있다. 시장하지 않더라도 길게 선 사람들이 장터국밥의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사야 할 생필품이 없더라도 장날이면 아버지도 장터에 꼭 나가시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장터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던 내 손에는 봄기운 완연히 머금은 딸기 한 팩과 봄동 한 '봉다리', 쑥떡이 들려져 있었고 나는 어느 새 장터국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있었다.아버지를 추억하면서 국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사이 우리도 아버지가 되어있다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봉황시장 안쪽 길로 들어서다보면 <5.16식당>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노포(老鋪)를 만날 수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 구미답게 박 전 대통령의 '5.16군사혁명'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은 식당이 아닌가 궁금증을 유발하는 식당이다.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
구미는 조선조 실학자인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선산은 삼국시대부터 일선, 숭선, 선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들어와서 선산으로 자리잡았다.)에서 난다'고 실려있다. 선산도호부가 자리한 곳이 현재의 선산읍이었다. 지금은 구미시에 편입된 선산이지만 조선시대 편찬된 <일선지>에 따르면 구미는 선산도호부 관할에 '구미역'(驛)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는 금오산 자락의 작은 마을이름이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인재의 보고라고 칭송한 선산이 야은 길재(吉再)부터 김숙자-김종직-하위지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 성리학의 산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말 우왕 때부터 조선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산읍 노상리와 이문리 일대 마을에서 14명의 장원과 부장원, 문과 급제자들이 배출되면서 '장원방'(壯元坊)이라는 마을 이름을 얻기도 했고 마을 뒷산을 장원봉(壯元峰)으로 부르게 됐다.
물론 구미와 선산의 현대사는 박정희 뿐 아니라 '김재규'도 담고 있다. '장원방' 마을엔 김재규 생가도 후손에 의해 복원돼 있어, 5.16을 함께 한 선산 후배를 발탁한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하면서 10.26사태를 일으킨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배신의 역사도 함께 기억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일제강점에 항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시국선언과 같은 사설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항거한 장지연 등도 선산이 낳은 큰 인물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이 날에 목놓아 우노라"라는 뜻으로 장지연은 이 글에서 고종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개돼지만도 못한 매국노라고 준열하게 비판하면서 당시의 2천만 동포가 국권회복을 위해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선산장터는 그 후 3.1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4월 12일 독립운동가 권오환 등이 주동이 된 50여명의 군중이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인 항일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선산객사
옛 선산장터인 중심대로는 오래된 소도시 냄새가 물씬 난다. 그러나 그 길 한 가운데에는 선산읍행정복지센터가 자리잡고 있고 그 옆에 팔작지붕을 갖춘 웅장한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선산객사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산객사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서 1984년까지 선산읍사무소로 사용되다가 이후 읍사무소를 바로 옆에 신축하고 현재의 형태로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
'객사'라는 명칭 그대로 선산도호부에 관리들이 출장을 오면 '객관'(客館)으로 쓰던 곳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남관과 북관, 청회루(淸廻樓), 양소루(養素樓)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으나 1492년(성종 23)에 부임한 부사 송후출이 3년 만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장대석 한벌대의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5량 가구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으로 건축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단아하고 소박한 단층집구조다.지붕 용마루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을 조각하여 안치하였는데 양끝에 암수의 어미가 있고, 가운데에는 암수의 새끼가 있는 특이한 모양이다. 도리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였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서까래는 둥글고 부연을 달았다.
선산객사와 선산읍성 '낙남루' 등 남아있는 조선시대 건축물과 '장원방'마을 등을 둘러보면 선산이 조선인재의 보고였다는 택리지의 서술에 나름 고개를 끄떡이게 될 것이다.
선산오일장이 서는 장터가 시작되는 선산읍성의 남문, '낙남루'(洛南樓)는 구미에서 선산으로 들어서는 초입이다. 낙남루는 조선시대 선산도호부의 읍성으로 들어서는 관문역할을 했다. 일제 때 완전히 허물어졌으나 현재의 낙남루는 2002년 과거의 모습을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사방이 탁 트인 낙남루 누각에 오르면 조선시대에는 선산도호부가 수많은 조선인재를 배출하면서 상당히 위세당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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