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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88>귀향하는 벗을 위한 조영석의 시서화

미술사 연구자

조영석(1686-1761),
조영석(1686-1761), '원주행선도(原州行船圖)와 시고(詩稿)', 1723년(38세), 종이에 담채, 62.5×43.5㎝, 개인 소장

위는 관아재 조영석이 그린 '원주행선도'이고 아래는 자작시를 쓴 시고다. 조영석의 이 두 작품은 열다섯 살 위인 벗 김상리로 인해 탄생했다. 김상리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강원도 원주로 귀향하며 "시와 그림으로 떠나는 길을 전별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헤어짐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이루어진 조영석의 시서화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시는 이렇다.

수습금서재일주(收拾琴書載一舟) 거문고와 책을 챙겨 한 척 배에 싣고

휴장가실상원주(携將家室上原州) 가족을 이끌고 원주로 가네

즉금경락무청안(卽今京洛無靑眼) 서울에는 이제부터 청안(靑眼)이 없을 텐데

귀로강호접소추(歸路江湖接素秋) 그대는 귀로의 강호에서 가을을 만나겠네

오도가감쇠봉탄(吾道可堪衰鳳歎) 우리 도(유학)가 쇠약한 봉황의 탄식을 어찌 견디랴

객행진사억로유(客行眞似憶鱸遊) 그대 행로는 진실로 농어회 그리워한 장한의 노님과 같네

종자아역타향거(從玆我亦他鄕去) 이제 나 또한 타향으로 떠나리니

평경동서각축류(萍梗東西各逐流) 부평초처럼 동서로 각각 물결 따라 흘러가리

계묘(癸卯) 중추(仲秋) 조영석(趙榮祏) 1723년 8월 조영석

옛사람들은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 노자를 쥐어주기도 했고 헤어지기 아쉬운 정과 여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글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런 관습이 있어서 김상리는 서울에서 알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이별시를 요청했고, 그림을 잘 그렸던 조영석에게는 그림까지 부탁한 것이다.

시에 나오듯 김상리는 가족을 데리고 살림살이를 챙겨 배에 싣고 남한강 뱃길을 따라 원주로 갔다. 그런데 '원주행선도'에는 처자식도 이삿짐도 없다. 중국 고사풍의 옷차림을 한 두 인물과 사공, 짐 보따리를 그려 어디론가 떠남을 은유할 뿐이다. 배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는 것은 물길을 따라 하류로 흘러 내려가듯 뱃길이 순탄하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왼쪽 아래에 강안과 바윗돌, 버드나무 뿌리를 살짝 암시적으로 그렸고 위쪽으론 가지를 운치 있게 늘어뜨려 화면을 감쌌다. 멀리 갈대숲에 하얀 해오라기가 있어 쓸쓸한 서정을 돋운다. 자세히 보면 모두 6마리다.

조영석은 풍속화로 유명하지만 30대 때인 '원주행선도'는 고사인물화 풍이다. 다만 정겨우면서도 실감 나는 보따리 두 개에서 이후 만개할 조영석 풍속화의 사생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18세기에 출현한 새로운 장르인 풍속화는 윤두서가 문을 열어젖혔고 조영석, 강희언, 김두량 등이 이어받아 뿌리를 단단하게 했으며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화원 출신 대가들에 의해 만개한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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