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그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2023년 12월 경산의 한 갤러리에서다. 마치 캔버스에 커다란 몸을 구겨넣듯 잔뜩 웅크린 사람에게서 알 수 없는 우울함과 고독감이 배어나왔다.
그로부터 1년여 만, 작품 속 인물들은 훨씬 자유로워 보인다. 팔과 다리, 손과 발을 화면 속에서 자유롭게 뻗어내며 몸짓이 그려내는 언어에 집중한다.
그림은 온전히 작가의 삶과 감정 그 자체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정희윤 초대전 '보고, 보이는 자'가 열리고 있는 갤러리 토마(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18-13)에서 만난 작가는 그림의 인물들처럼 보다 홀가분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2023년 그 당시는, 너무 힘들고 지쳐있던 시기였어요. 30년 넘게 그림을 그렸으니 기술이 늘어 뭐 이 정도 하면 됐지 하며 매너리즘에 빠지고, 전시는 여러 번 해봤고 집에 캔버스는 쌓여가고, 몸의 노화는 본격적으로 체감되죠. 가장 무서운 건 따로 있어요. 누군가의 전시에 갔는데 나의 기대와 달리 예전 작품과 변한 게 없다고 느껴질 때, 나도 그렇게 될까봐 너무 걱정이 컸어요."
살짝만 어긋나도 내가 쌓아온 것이 무너질 것 같다고 느껴지던 그 때, 누군가가 윤석남 작가의 얘기를 들려줬다. 40세에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80대에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에 선정됐고 지금도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 작업에 매진한다는 얘기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배워서 지금까지 이어왔는데, 여기에서 포기하는 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자'는 마음을 단번에 먹었다. 그 결과물을 지난해 수성아트피아 지역작가 공모 지원사업 'A-ARTIST'에서 펼쳐보이며, 자유로워진 작업 태도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수성아트피아 전시 때 자신을 옭아매던 족쇄들이 조금씩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번 전시는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등산을 가면 오르기 시작한 지 40~50분쯤이 가장 힘들다. 숨도 차고 괜히 올라왔나 싶다가, 희한하게 그 시점이 지나면 더 힘들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진다.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러너스 하이'처럼. 시원한 바람도 느껴지고 예쁜 꽃도 눈에 들어오고, 저 꼭대기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지금이 딱 그 때"라고 덧붙였다.
설사 산꼭대기의 풍경이 생각만큼 멋지지 않을 수 있어도, 이 길을 걷고 있는 그 자체가 좋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그림을 그만둬야하나, 돈도 안되고 몸과 마음이 고달픈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나, 수없이 반문하면서도 견뎌온 자신에게 토닥거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작업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은 그가 꾸준히 쌓아온 노력에서 기인한다. 그에게 화가의 꿈을 심어준 에곤 실레의 그림 속 선(線)에 매료돼, 누드 크로키를 30년 가량 그리며 인체의 아름다움에 천착했다. 어느 날은 전통 민화에서 모던함을 발견해, 민화를 수년째 배우고 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작품 속에서는 민화 속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큰 파초 작품도 그 중 하나다. 파초는 겨울에 죽은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다시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특히 작가는 큰 파초 작품에서 가지를 잘라내는 상상을 해, 전시장 곳곳의 작은 작품에 옮겨 심어놓았다. 그는 "작은 파초들이 잘 뿌리내릴 수 있을지, 앞으로의 전시에서 어떻게 자란 모습을 보여줄지 나도 궁금하다"며 웃어보였다.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며 폭풍처럼 흘러간 삶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꿈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해온 작가는 올해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판화과에 입학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한강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글을 쓰기 위해 하루 2시간씩 운동을 한다던데,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 정말 공감합니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전시는 오는 20일까지. 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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