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오쿠다 월드의 시작, 이라부여 영원하라!

[책] 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 지음 / 은행나무 펴냄

[책] 공중그네
[책] 공중그네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읽다가 답답한 사건을 발견하면 늘 말씀하셨다. "이게 다 배가 덜 고파서 그런 거다.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여 봐라, 딴 짓할 정신이 어디 있겠니?" 어려서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현대인이라면 고민 한 두 가지는 안고 산다. 고민이 몸을 건드려 통증을 유발하거나 정신을 헤집어 머리가 아플 때 병원을 찾아도 뾰족한 답이 안 나온다. 원인이 불투명하니 해결책도 묘연하다. 이때 내리는 대개의 처방은 '스트레스'다. 오쿠다 히데오의 히트작 '공중그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수면부족이나 컨디션 난조를 호소한다. 하지만 우리의 히어로 닥터 이라부가 누군가.

이라부는 몹시 뚱뚱한 곱슬머리에 살갗은 흰 바다표범 같고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 중년의 의사다. 이래봬도 '이라부 종합병원' 지하에서 정신과를 담당하는 의학박사다. 환자가 들어오면 다짜고짜 말한다. "그럼 주사나 맞을까?", "주사 먼저 놓을까?", "주사나 큰 걸로 한방 놔버릴까." 주사라고 해봐야 수면에 도움을 주는 비타민제제가 고작이다.

이라부를 찾아온 환자들은 하나같이 공통의 증상을 보인다. 일종의 집단무의식 같은 것. 선단공포를 가진 야쿠자는 내면의 자기와 갈등 중이고, 공중그네에서 거듭 실패하는 고헤이는 후배에 대한 견제와 혐오를 드러낸다. 외에도 금기 위반의 쾌감이 필요한 의사 다쓰로와 거물 신인 등장에 불안해하는 야구선수 반도 등등. 작가가 그려낸 이들은 신자유주의 속 무한경쟁에 신음하는 일본사회의 중산층이다. 어느 정도 성공하여 사회적 위치를 획득한 이들이 겪는 불안과 공포.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는 동안 각자의 몸이 고장나버린 것이다.

거대한 사회 문제가 돼버린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해결할 길은 현실을 내려놓는 것뿐. 정신과 의사가 상담으로 고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오쿠다 히데오는 이라부의 입을 빌려 말한다. "거 있잖아, 요즘 텔레비전에서 카운슬러가 환자의 고민을 듣고 격려해주는 장면. 그런 건 말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즉 스트레스란 것은 인생에 늘 따라다니는 것인데 원래부터 그렇게 있는 놈을 없애려 한다는 건 쓸데없는 수고라는 거지. 그보다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게 좋아."

그렇게 내놓은 이라부의 해결책은 더 가관이다. 야쿠자를 습격하고 도망가거나 혹은 휴가를 내서 이라크 분쟁지역으로 가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회사고 가정이고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냐는 것. 동전도 못 집을 정도로 결벽증이 심한 사내가 오사카 대지진을 겪고 증상이 사라졌다는 얘기도 있으니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이유는 어차피 원인불명의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원인을 알아 봤자 절대로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공중그네'는 괴짜 의사 이라부를 등장시켜 웃음 세례를 선사하지만, 코믹만으로 공전의 히트를 논한다는 건 게으른 분석이다. 금수저 의사 이미지를 환자와 동등하거나 더 모자란 수준으로 내렸고, 누구나 문제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는 동반심리를 활용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이 나온 2004년은 일본사회가 '잃어버린 20년'을 통과하던 시점. 무기력과 과도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분투하는 당대 중산층의 불안이 고스란히 담긴 까닭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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