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영재원의 창작수업 시간에 한국현대소설 중 한 편을 골라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비평하는 글쓰기를 한 적이 있다. 글의 장르와 형식은 자유로 정해 주었다. 학생들의 결과물 중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현진건 소설가의 '운수 좋은 날'에 대한 비평인데, 특이하게도 독후화 형식으로 그림까지 곁들인 기사문이었다. 주인공 김첨지가 수갑을 찬 채로 경찰관들에 이끌려 감옥으로 들어가는 삽화가 있었고, 그의 죄명은 '가정파괴'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운수 좋은 날'은 일제 치하의 도시 빈민층인 인력거꾼 김첨지가 어쩌다 운 좋은 하루를 맞이하지만 결국 아내를 잃고 만다는 비극적 내용이다. 비 오는 겨울날, 가난한 서울 변두리에서 아내를 잃은 주인공을 보며 대개는 김첨지의 암울한 미래와 더불어 식민지 역사를 통탄해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평문은 결국 한 가정을 파국으로 이끈 장본인이자 책임은 김첨지였다는 맥락이었다. 오랫동안 아팠던 아내가 아침부터 심상치 않았다는 것, 이상하게도 계속 따라붙은 행운에 불길함을 느꼈다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어깃장을 부리며 술잔을 기울였다는 것, 이 모든 비극을 나라의 비운으로 돌리는 무책임함이 결국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는 결론이었다.
학생의 새로운 시각이 신선했고, 한 세기가 넘었지만 여전히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작품의 위상에 경의를 표하게 된 경험이었다. 이렇듯 독자의 연령, 성별,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해석되는 글이 결국 좋은 소설이자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대구 지역 출신 소설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였던 '현진건' 선생의 작품이 21세기의 10대들에게 유의미한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는 사실로도 짜릿한 순간이었다.
현진건 선생의 말이 나왔으니 대놓고 그의 업적과 계보에 대해 이야기 좀 해야겠다.
대구를 문화의 불모지로 일컫는 수식어가 많았다. 지방문학의 소멸 시대에서 문화 인지도조차 딸리는 문학판에 현진건 선생의 업적과 작품은 우리의 크나큰 자부심이자 두고두고 계승해야 할 명맥임이 틀림없다. 그 무겁고도 뜻깊은 사명감으로 현진건운영사업회는 2021년 사단법인으로 승격시켰고, 2023년부터 소설 전문 무크지 '빙허'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아울러 올해 17회를 맞이하는 현진건문학상도 대한민국의 문학상으로 그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시간이 흘러 '운수 좋은 날'은 김첨지의 죄를 묻는 대신 또 우리에게 어떤 파격의 생각거리를 던져줄까. 한없이 운이 나빴던 그의 하루가, 또 100년을 지나 먼 훗날에도 재미있고 인상 깊은 이슈를 쏘아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운수 좋은 날'이라는 반어법 제목처럼, 빈 것에 의지한다는 뜻을 가진 그의 호, 빙허(憑虛) 또한 아이러니가 될 수 있도록 현진건 선생의 기억을 더 꽉꽉 채워나가는 작업이 이어져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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