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나요?"
누군가는 꽃 피는 거리를 걷고, 누군가는 따스한 햇살을 창문 너머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곳 경북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의 자작나무숲에서는 계절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 겨울의 마지막 눈이 수피(樹皮)에 내려앉아 있고, 봄의 첫 기척이 바람 끝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이 숲은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당신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제 그 고요한 순백의 숲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30년 가까이 기다린 숲…꽃말 '당신을 기다립니다'
봄은 아직 머뭇거리지만, 숲은 먼저 계절을 품기 시작했다. 영양 자작나무숲에는 겨울의 마지막 숨결과 봄의 첫 기척이 동시에 머물고 있다. 경칩(만물이 잠에서 깨는 시기, 3월 5일)이 지났지만 자작나무숲 곳곳엔 소복한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봄이, 지금 이 숲으로 향하고 있다고.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한 편의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쭉쭉 뻗은 채 하늘을 향해 자라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수피에 햇살이 닿을 때마다 은빛이 번쩍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지마다 걸린 눈꽃은 아직 겨울의 흔적을 품고 있지만, 그 사이로 올라오는 새순의 파릇함은 분명히 봄이다.
이 숲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30년 가까이 숨어 있던 비밀의 숲이다. 1993년 조성된 이후 깊은 산속에 묻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이곳은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된 채 그 자체로 숲의 시간을 쌓아왔다. 주변을 둘러싼 금강소나무 군락이 장벽처럼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고, 불편한 접근성은 오히려 이 숲을 고요하게 지켜주는 방패였다.
그러나 이 숲도 때를 기다려왔다. 지난 2019년부터 영양군과 산림청이 자작나무숲을 대중에 공개하고 본격적인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숨어 있던 이 숲은 마침내 사람들을 맞이하게 됐다. 팬데믹 이후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고 마음마저 지친 시기, 자작나무숲은 고요히 그 존재를 드러내며 새로운 힐링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치 고요히 기다리던 친구가 "이제 와도 괜찮다"고 말하듯, 자작나무는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 꽃말처럼 사람들을 품기 시작했다.

◆걷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치유
영양 자작나무숲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체 면적 30.6㏊, 축구장 40개에 해당하는 공간에 자작나무 12만여 그루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처음 심을 당시 고작 30㎝ 남짓하던 묘목은 지금은 키 20m가 넘는 거목이 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나무 둘레도 60㎝에 육박한다. 나무 하나하나가 마치 숲속의 귀부인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줄지어 서 있다.
자작나무숲은 두 개의 메인 코스로 구성돼 있다. 1코스는 1.49㎞, 2코스는 1.52㎞다. 노란 리본을 따라가면 1코스, 파란 리본을 쫓으면 2코스지만, 정해진 길이 아니어도 괜찮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좋은 곳이 바로 이 자작나무숲이다. 길은 평탄하고 아늑하며,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곳곳엔 포토존이 마련돼 있어 누구나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도 제격이다. 연접한 전나무숲길과 임도도 탐방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킨다.
고도 800m가 넘는 숲길 끝자락에는 전망데크가 설치돼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숨이 멎을 만큼 장관이다. 자작나무 우듬지가 한 폭의 은빛 융단처럼 산 사면을 수놓고, 그 위로 흐르는 바람마저 시적인 울림을 준다. 그냥 걷기만 해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이 숲은 사람을 치유한다.
자작나무는 자기 몸을 줄이고자 스스로 잔가지를 버린다. 그 옹이 하나하나가 성장의 흔적이고 숲의 철학이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더 높이 자라기 위한 결단. 인간의 삶에도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일까. 이 숲을 다녀간 사람들 대부분은 '많은 걸 느끼고 돌아간다'고 말한다.

◆나무가 들려주는 고요한 전설
자작나무는 특유의 백색 수피로 '빛의 나무'라고 불린다. 기름기가 많아 과거 촛불이 없던 시절에는 '화촉'(樺燭)의 재료로 쓰였고, 껍질이 얇고 질겨서 종이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연애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숲 곳곳에는 나무껍질에 연인의 이름을 새긴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숲 입구에는 '나무가 아파요'라는 안내 푯말이 붙어 있다. 이 숲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얼마나 소중히 지켜야 할 공간인지를 일깨운다.
자작나무는 그저 아름다운 나무 그 이상이다. 수세기 전부터 인간의 삶과 문화, 전설과 연결됐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말안장의 재료, 북유럽 신화 속 자연의 정령, 영화 속 마법 빗자루의 소재 등 자작나무는 시대를 넘나드는 순수함의 상징으로 통한다.
자작나무 수피는 단순한 나무껍질이 아니다. 얇고 질기며 썩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는 종이로, 불쏘시개로, 촛불의 재료로도 활용됐다. 하얀 수피에 연애편지를 적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말도 그렇게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 숲에는 '빛'이 흐른다. 햇살을 반사하는 수피는 숲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자연조명 아래에서 걷는 이 기분, 직접 마주한 이들만이 알 수 있다.

◆모두를 위한 숲…산림관광 명소로 진화
영양군은 이 숲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경북도와 함께 '국유림 명품 숲' 지정 이후 ▷힐링센터 ▷숲 체험원 ▷임산물 카페 ▷탐방로 ▷에코로드 전기차 운영 기반 조성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총 28억원이 투입됐고, 현재는 대부분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자작나무숲에는 주말마다 2천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숲'이 아닌,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기 힐링 여행지로 발돋움한 셈이다. 걷는 여행을 즐기는 트레커들과 가족 단위 관광객, 사진작가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자작나무숲을 찾아오고 있다.
접근성 개선도 한창이다. 이전에는 진입로가 험하고, 숲 입구까지 3.2㎞를 걸어야 했지만 이제는 전기차 셔틀이 일부 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통신기지국도 개통돼 휴대폰이 터지지 않던 불편함도 해소됐다. 앞으로 더 많은 탐방객들이 보다 쉽게 숲을 찾고, 보다 안전하게 자연을 누릴 수 있게 될 전망이다.
경북도는 '영양 자작도(島)'라는 이름으로 이 숲을 산림관광 거점으로 개발하고 있다. ▷산림관광 상품화 ▷체류형 관광지 조성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죽파리 자작나무숲을 국내 대표 웰니스 관광지로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최근에는 해외 언론사 팸 투어를 유치하며 국제적인 산림관광 자원으로 도약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이곳은 단순히 사진을 찍고 가는 숲이 아니다. 걷고, 머물고, 느끼고, 쉼을 얻는 공간이다. 오랜 시간 세상에 숨겨졌던 이 비밀의 숲은 이제 봄바람을 타고 사람을 부르고 있다.
그저 마음만 비우고 찾아오면 된다. 자작나무숲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을 기다립니다'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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