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가짜 뉴스 덕분에 영웅이 된 최익현

대마도로 유배를 가서 왜놈들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고 알려진
대마도로 유배를 가서 왜놈들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고 알려진 '절개의 화신' 최익현.
최익현이 흑산도에 유배 시절 바위벽에 새긴
최익현이 흑산도에 유배 시절 바위벽에 새긴 '기봉강산 홍무일월' 글씨.
최익현 묘소 앞
최익현 묘소 앞 '춘추대의비' 비문에 새겨진 '餓死殉國'(아사순국)이라는 문구.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가짜 뉴스다.
충남 칠갑산에 세워진 최익현 동상.
충남 칠갑산에 세워진 최익현 동상.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80여 년, 한국인들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함몰되어 항일 독립운동을 종교와 같이 숭앙하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는 항일 독립운동이고, 집안의 누군가가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하면 뼈도 못 추리는 인격 살인을 당하게 된다.

필자는 이 칼럼 지면을 통해 가짜 독립운동가들의 실상을 고발한 바 있다.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에 들어가 보면 아직도 가짜 독립운동가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심지어 가짜 독립운동 공적에 의해 가장 큰 영예인 건국훈장을 추서한 사례도 부지기수다. 이번 호에는 주자성리학의 거두이자 구한말 항일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맞서 싸웠으며, 대마도로 유배 가서 왜놈들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고 알려진 '절개의 화신' 최익현의 역사적 사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거물 유학자 이항로의 제자다. 최익현의 스승 이항로는 송시열의 직계로서 화서학파를 일군 사람이다. 그는 서양인을 동류의 인간이 아니라 어패류나 게 같은 갑각류로 인식했고, "주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듣지 않을 것이며, 주자의 지(旨)가 아니면 감히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 극단적인 주자성리학 원리주의자였다.

1855년(철종 6) 과거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최익현은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조선의 개화·개국·근대화에 격렬하게 저항했고, 조선을 중화 질서로 회귀시키기 위한 수구의 화신으로 맹활약했다. 1876년 2월 조선이 일본과 개항을 위한 강화도조약 협상을 시작하자 박규수의 학통을 계승한 개화파들은 이를 지지했다.

◆수구, 위정척사, 중화의 화신 최익현

반면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친은 사학(邪學)의 지름길이며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순조와 헌종 때 서양인들을 주륙했듯이 계책을 세우시라"(『고종실록』, 1876년 1월 23일)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고 분노한 고종은 최익현을 "임금을 속이고 핍박하는 말을 만들어 방자하게 지적하여 규탄한 죄"로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

그는 유배 생활 중 흑산도 바위벽에 '기봉강산(箕封江山) 홍무일월(洪武日月)'이란 글씨를 새겼다. 기봉강산이란 중국 은나라 기자가 만들어준 나라가 조선이며, 홍무일월은 주원장의 나라인 명의 해와 달이 조선을 비춰주는 해와 달이라는 의미다. 조선은 애초에 중국인이 만들어준 나라이고, 조선의 해와 달은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중국 명나라의 해와 달이란 뜻이다(송복, '특혜와 책임', 가디언, 195쪽).

3년 후 유배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고향으로 돌아가 주자성리학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최익현은 개화운동과 의회설립운동을 주도한 독립협회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적대했다. 최익현은 의회(민회·民會)는 불평분자들의 모임으로 기강을 문란케 하니 그 무리를 처벌해야 하며, 군주가 유학에 힘쓰면 나라가 절로 평안해지니 국왕은 학문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개화·자주·문명·부강에 대한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화는 사람을 금수(짐승)로 타락시키는 일, 국가를 망치고 집안을 전복시키는 일을 일컫는다. 자주는 국가를 일본에 넘겨주고서 우리나라의 정사와 법령에 대해 하나하나 일본으로부터 자문을 구하는 일을 일컫는다. 문명은 국가를 잃은 군주를 거짓으로 존중하고 호칭만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는 일, 억지로 예의를 무너뜨리고 오랑캐로 추락시키는 일을 일컫는다. 부강은 우리나라의 군제를 없애고 국가방위를 폐지하여 국가의 형세를 날로 약화시키는 일을 일컫는다."(박균섭, '최익현과 일본', 인문과학 제29집).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최익현은 농민군을 비적으로 몰아 섬멸 대상으로 삼았고, 단발령에 극렬 저항하다 체포 수감되었다. 그에게 상투는 인류와 짐승을 구분하는 징표였다. 최익현은 상투를 자르면 그 즉시 인간은 짐승으로 변해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 될 것이라면서 "차라리 목을 끊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 수는 없다"라고 극렬 저항했다.

◆최익현은 정말로 단식하여 굶어 죽었나?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은 제자들과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 봉기했다. 그는 "왜놈들의 살점을 뜯어 먹고 놈들의 가죽을 바닥에 깔고 자며, 저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멸하고 그 소굴을 소탕하자"라는 창의 격문을 발표하고 순창으로 행군했다. 이토록 강경한 격문을 선포한 의병이었으니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당연했다. 무슨 까닭인지 최익현 의병장은 순창에서 관군에 포위되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라며 의병을 해산해 버렸다.

그는 남아 있던 제자들과 의관을 갖춰 입고 앉아서 '맹자'를 읽다가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헌병대에 구금된 최익현은 3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제자 임병찬 등과 함께 대마도 이즈하라의 위수영에 유배 감금되었다. 최익현은 왜적이 주는 음식을 전폐하고 단식 투쟁하다가 1906년 12월 30일, 74세를 일기로 적지에서 순국(최영희, 면암집 해제, 한국고전번역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숟갈의 밥이나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왜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거부한 최익현은 조선의 참된 선비정신의 소유자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 결과 수양산에 들어가 주나라 곡식을 거부하고 고사리 캐 먹다 굶어 죽은 백이(伯夷)·숙제(叔齊)와 동급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그런데 함께 유배됐던 제자 임병찬의 기록에 의하면 최익현 사망의 진짜 이유는 알려진 것과는 완전 딴판이다. 최익현의 단식은 사흘 만에 끝났으며, 그의 사인(死因)은 단식이 아니라 풍토병이었다. 최익현의 아들과 의사가 대마도로 건너와 병구완을 했으나, 차도가 없어 1907년 1월 1일, 대마도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임병찬, '대마도 일기').

그의 유해는 1907년 1월 고국으로 돌아와 묘소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봉수산에 묻혔고, 충남 청양군 대치면 칠갑산에 동상이 설립되었다. 백제의 비구니가 창건했다는 대마도의 수선사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가 세워졌다.

최익현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최익현에 대한 세평은 혹독했다. 황성신문 1907년 1월 14일 자의 '고 찬정 최익현 씨를 조상함(吊故贊政崔益鉉氏)'이란 비판적 사설이 그 하나다. 사설 내용은 "구래 학설을 베낀 것이 아닌 것이 없고, 세상은 변했으나 혼자 변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최익현이란 내용이었다.

이랬던 최익현을 대마도에서 일본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둔갑시킨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였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을 비롯해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간한 배일(排日) 논조로 널리 알려진 신문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3월 20일, '대마도에서 백이·숙제처럼 죽은 최면암 씨'라는 엉터리 보도를 하여 시대착오적인 수구의 화신을 반일 영웅으로 부각시켰다.

◆대한민국 건국에 어떤 도움을 주었나?

최익현이 대마도에 감금되어 일본 음식을 거부하고 조선 음식만 먹다가 공급이 제대로 안 되어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는 내용은 어떤 근거도 없는 거짓말, 즉 가짜 뉴스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민족주의에 눈이 멀어 이런 허무맹랑한 가짜 뉴스를 근거로 1962년 최익현에게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상훈법 제11조에 의하면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의 최익현에 대한 공적조서 개요는 다음과 같다.

① 1876년 한일수교조약 때 여러 번 상소하여 극력 반대하였음.

② 1905년 러일전쟁 배일 운동을 일으키고 여러 번 상소하다가 왜인에게 체포되었으나 석방됨.

③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자 임병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근 1천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순창 등지에 웅거하고 일본군에게 반항하다가 적에게 패하였다.

④ 1907년 일본의 16조목의 죄를 나열해서 왜황(일본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보내는 등 열렬히 활약하다가 일본 헌병사령부에 피체, 대마도에 감금되어 일본 음식을 먹지 않고 한국 음식만 먹다가 공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옥중에서 아사함.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 최익현 공적조서 개요 ③번 항목 "일본군에게 반항하다가 적에게 패하였다"라는 내용은 "의병을 해산하고 의관 정제한 후 '맹자'를 읽다가 체포되었다"로 수정되어야 하며, ④번 항목은 근거가 없는 내용이니 삭제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최익현은 자유·인권·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 대한민국 건국에 어떤 공헌을 했으며,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어떻게 이바지했기에 건국훈장을 추서한 것일까?

답변이 궁해지다 보니 한국 사학자들은 희한한 면죄부를 창조해 냈다. "위정척사론자들의 열렬한 외세배격과 의병 활동의 모습을 통해, 그들에게 단순히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독선과 오만에서 비롯된 수구성보다는 근원적이고 강고한 주체적 인식이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박태옥, '면암 최익현의 철학사상에 나타난 위정척사의 문제', 한중인문학연구 26, 2009)라는 논리다.

대한민국이 기억하고 상찬해야 할 독립운동은 자유·인권·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어야 한다. 최익현은 그런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사람이다. 반일 종족주의를 앞세워 일본과 싸운 사람으로 알려지기만 하면, 대한민국 건국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어도 무조건 건국훈장을 남발하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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