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향래의 소야정담(小夜情談)] 영호남 콘체르탄테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이자 유일한 백제 가요 '정읍사'는 행상 나간 남편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달을 서정적 감정이입의 그릇으로 삼은 백제인의 감성이다. 농경민족의 세계관과 생활관을 지배해온 달이 드디어 가요(歌謠)의 비중있는 소재와 주제로 등장한 것이다.

정서적 공감의 대상이었던 달은 삼국통일을 이루는 신라에서는 심미적 서정성과 종교적 신비성을 더한다. '원왕생가'와 '찬기파랑가'에서 형이상학적인 숭고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물며 '처용가'에 이르러서는 우리 문화의 독특성과 세계문화의 보편성을 공유한 특별한 문화 콘텐츠의 원천을 이룬다. 백제의 감성과 신라의 서정이 융합하면서 보다 차원 높은 경지로 승화된 것이다.

사화(士禍)가 난무했던 16세기 조선시대에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은 8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을 벌였다. 식민사관은 이를 공리공담이라 폄훼하지만, 혼란한 시대의 본질을 '인간'으로 보고 이기론(理氣論)을 인간의 심성에 적용할 때 드러나는 논점에 대해 치열하게 고뇌하고 논박했던 것이다. 혼탁한 사회의 근원과 본질이 '인간의 문제'였음은 46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하지 않은가.

논변의 심층성과 파급력도 도외시할 수 없지만, 여기서 새삼 주목하는 것은 그 과정이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 퇴계의 나이가 60대였고 고봉은 30대였다.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당대의 석학이었고, 고봉은 과거에 갓 급제한 선비였다. 퇴계는 경북 안동 출신이고, 고봉은 전남 광주 사람이었다. 세대와 경륜과 지역을 초월한 아름다운 논쟁으로 한국 정신사의 신기원을 이루어낸 것이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오는건지 못오는건지 오지 않는사람아, 안타까운 내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21세기의 대중가요 '안동역에서'는 가수 진성이 입신양명의 꿈을 이룬 노래이다. 안동역이 진성으로 하여금 오랜 무명의 터널을 벗어나 가요계 입성의 출구를 열어준 것이다.

그런데 가수 진성은 안동역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전라도 사람이다. 전북 부안 출신인 진성이 경북 안동을 소재로 한 노래로 인생역전을 이룬 것은 무슨 인연일까. '안동역에서'는 호형호제하던 영호남 가요인들이 합심해서 만든 히트곡이다. 노랫말은 안동 작사가 김병걸이 안동역에서 맺은 첫사랑과의 약속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작곡을 한 사람은 포항 출신 최강산이다.

구성진 트로트 가락과 첫사랑의 애절한 사연에다 첫눈이 대중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곡 '안동역에서'는 영호남 합작품인 셈이다. 진성은 안동역으로 출세를 하고, 안동은 진성 덕분에 대중적인 애향가 하나를 얻으며 역 광장에 노래비까지 세웠다.

이와 관련해서 꼭 소개해야 할 특별한 사연이 또 있다.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지역에 애써 마련한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얘기이다.

전남 광양 출신인 유충희 관장은 부산에서 사업을 하며 경주 보문단지에 가요박물관을 세운 세박자 인생의 주인공이다. 30여 년에 걸쳐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를 한자리에 모은 박물관에는 원통형 유성기부터 SP, LP 음반은 물론 악보, 무대의상, 축음기, 사운드 시스템 등 수십만 점의 진귀한 유물들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지난 시절의 풍정(風情)을 오롯이 머금고 있는 추억의 창고이자 풍물의 곳간이다.

포크 음악이 유행하던 젊은 시절에 장욱조의 '고목나무'와 양희은의 '아침이슬', 박인희의 '끝이 없는 길'을 자주 들었다는 그는 음악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요는 우리 영혼의 밥과 같다'고 여긴다. 노래가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 한국인이 지난 100년의 풍진(風塵) 세월을 지나올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조용필의 '기다리는 아픔'을 즐겨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주에 박물관을 마련한 것은 내외국인 방문객이 많은 천년고도와 관광 인프라를 갖춘 보문단지를 주목했다고 한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공유를 우선시한 호남인의 감성을 영남에서 꽃피운 것이다. 역학(易學)에서도 언급했듯이 상극(相剋)은 함께 파멸하는 죽음의 길이고, 상생(相生)은 더불어 성장하고 발전하는 지름길이다. 독주와 독선으로 치닫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콘체르탄테 인생이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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