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은 잠시지만 지상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주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술집은 삶의 중화제이다. 목로주점, 선술집, 대폿집…. 지난 시절 호주머니 사정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지만 '낭만주당'들의 음주문화는 '언어도단스러움'이 있었다. 요즘 MZ세대들은 상상 못 하겠지만 차수를 불려가면서 여러 술집을 전전했다. 심지어 총대를 잡은 사람이 자기 안방으로 데려가 다음날 출근 때까지 판을 키우기까지 했다. 수주 번영로의 에세이 '명정40년'에는 그가 횡보 염상섭, 공초 오상순과 함께 취흥 때문에 벌거벗고 성북동 산골짜기에서 혜화동 대학로 로터리까지 소를 타고 내려온 음주 일화가 소상히 적혀있다.
◆안주가 주연 술은 조연
팔도에는 별미 술판이 산재해 있다. 전남‧경남 바닷가, 그러니까 목포, 여수, 통영, 창원(진주 마산 포함), 사천(옛 삼천포), 부산 등지에는 선창 생활권이 술집 속으로 그대로 유입됐다. 인심 좋고 배포 강한 주모는 그날 안주거리를 찾아 직접 수산시장을 전전한다. 그리고 그 계절, 그날의 사정에 맞는 20여 가지의 별별 어패류 안주를 준비해 둔다. 물론 술이 '주연'이고 안주는 '조연'급. 술병이 늘어날수록 주모의 서비스 안주는 더 질펀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서‧남해안 별미 술집의 대표격은 통영의 '다찌', 마산의 '통술집', 진주의 '실비', 군산의 서양시장 실비집', 사천(1995년 삼천포와 통합) 실비집, 이밖에 내륙권에는 전주의 경우 삼천동 막걸리골목과 가맥(가게 맥주), 서울은 을지로 '노가리호프골목'도 손에 꼽힌다.
나도 그 언저리에 대한 여러 추억이 있다. 지금도 통영의 대표격 전통음식연구가인 이상희 사진작가는 초겨울만 되면 '다찌팅'을 하자고 채근한다. 부산의 충무새벽시장 내 동환‧경화‧수야잡 등도 부산식 선어실비집 명소랄 수 있다. 이병어회, 준치회 등 있는 것 갖고 즉석 안주를 내민다. 대구식 실비집이랄 수 잇는 뭉티기집도 이 행렬에 있다. 얇게 썰어낸 한우 우둔살 사시미와 참기름 마늘양념장은 주연급. 그리고 소 등골과 생간, 소양, 무국은 조연급.
군산 실비집의 리더는 신영시당 내 '홍집'인데 대충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술을 마시면 안주를 준다. 술 주문이 거듭되면 또 안주를 낸다. 더 줄 게 없으면 과일을 깎아 낸다. 이제 '계산하라'는 신호다. 요즘은 관광객이 몰리고 인건비며 재료비가 올라서 상에 미리 값을 매겨두는 방식으로 형식이 바뀌고 있다. 옛 방식이 궁금하면 신영시장으로 가라. 원래 술집들이 몰려 있던 군산항 째보선창과 맞물려 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은 삼천동에서 시작됐다. 요즘은 서신동, 경원동, 효자동 등으로 확산됐다. 보통 한 주전자에 막걸리 3통이 들어간다. 막걸리만 시키면 안주는 두부찌개, 게장, 계란찜 등 10가지 이상이 나온다. 홍어회가 올라오는 집도 있단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상권이 많이 죽어버렸다. 삼천포항과 용궁 수산시장, 남일대해수욕장을 가까이 두고 있는 사천시 향촌동 일대는 '사천·삼천포 실비' 전문집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아참, 60여 횟집이 군집을 이룬 목포 북항 회센터에 가면 입이 쩍 벌어진다. 2명이 12만원 정도 주면 국내 주요 어패류 20여 가지를 원 없이 음미할 수 있다. 내가 보긴 전국 최강 해산물 곁반찬 라인인데 지난주 거기 가서 맛을 보고 왔다.

◆통영다찌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일본에는 서서 술을 마시는 '다치노미'(立飮) 문화와 연결돼 있다. '이모카세(한국식 오마카세)'라고나 할까. 다찌 선술집 메뉴의 기본은 술이다. 술을 시키면 안주가 따라 나오고, 술을 더 시키면 안주도 그만큼 더 준다. 술값이 소주 한 병에 1만 원이 넘게 치는 이유는 안주 때문이다. 대추나무, 벅수실비, 강변실비 등이 메이저급인데 이밖에도 얼추 50여 군데가 다찌형 술집으로 움직인다.
대추나무의 가격은 이렇다. 2인 기본 6만원. 4명이 가면 12만원, 소주 1병에 맥주 6병을 마시면 술값은 3만5천원. 합이 15만5천원이다. 기본으로 호래기무침, 맵싸리고동, 부추멸치무침, 청각물김치, 모자반, 마재기(서실), 꼬막, 잡채, 해물부침개, 우럭, 용치놀래기, 전어, 생선전, 조기, 돔, 메가리(전갱이) 구이, 미더덕회, 호래기회, 소라, 전복, 멍게, 조개 등 해산물 한 접시, 문어숙회, 곰장어수육, 성게알 등이다. 육지권 손님에게는 산해진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이하게 술은 얼음 바케스에 담아 내준다.

◆마산통술을 찾아서
6년 전 어둑한 시각, 탤런트 최불암이 한국인의 밥상을 촬영할 때 찾았던 오동동 '강림통술'을 찾았다. 서양화가 배창노의 아내가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가게를 지키고 있다. 여기는 테이블당 술은 2병 이상 마셔야 한다. 음료수 2병을 마셔도 1만2천원을 내야 한다. 2인상은 9만원, 4인상은 13만원이다. 추가 술은 병당 6천원이다. 통술의 어원을 한 상 통째로 내어준다고 해서 통술이라 했다. 통술골목에 옛 민주당사가 있었고 이 골목에서 3·15의거가 일어난다.
'오동동에서 술을 마시면 오동동파출소에서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 술 한 잔 마시고 길거리를 지나다 아는 사람 만나서 또 한 잔. 술자리 파하고 길을 나섰다가 아는 사람 만나 또 한 잔. 이러다 보니 결국 술에 취해 오동동파출소에서 귀가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다.
마산 통술문화는 '오동동통술골목소리길'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오동동 통술거리상인회는 2008년 결성됐다. 옛 마산시가 이 일대 거리 400m 구간을 '통술 특화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이 도로 양쪽에서 영업하던 통술집, 노래연습장 등 150여 개 업소 주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남성동과 신마산 쪽에 서호통술 등 10여 업소가 성업 중이지만, 원조는 역시 오동동이다. 토박이가 인정하는 통술집 3인방은 강림·유정·홍화통술.
이야기는 요정 쪽으로 건너간다. 광복 전후로 오동동에는 고급 요정이 많이 있었다. 오동동은 '요정과 바의 동네'였다. 지금도 '요정골목'이란 이름만은 남았다. 대표적인 요정은 청수원, 춘추원, 마산별관, 송학 등이고 대표적인 바는 오동동 바, 아리랑 바, 은좌 바 등이다. 대구의 종로·향촌동과 맞먹을 정도다. 평양, 서울과 더불어 인근 진주에는 권번(券番·기생을 양성하는 곳)이 있었지만 마산에는 권번이 없었음에도 요정만은 즐비했다. 70년대까지 영업했던 요정 춘추원 상호는 그대로 남아 있다.
70년대 오동동과 합성동 등을 축으로 등장한 통술집은 요정에서 차려낸 한상차림을 축약시킨 것이다. 초창기에는 갈비찜·갈치구이·삼계탕 등 다양한 음식을 고루 내놨다. 요즘엔 어패류 요리가 주축을 이룬다.
회원천변에 있었던 나래비(羅立) 선술집촌도 통술집의 변형 술집이라 보면 되는데 지금은 거의 점집으로 변해버렸다.
통술을 알려면 '오동동타령'을 불러봐야 된다. 54년 발표된 야인초 작사·한복남 작곡·황정자 노래다. 오동동이 배경이다. 오동동에서 얼마나 많은 니나노 소리가 울러 퍼졌으면 그런 노래까지 태어났겠는가. 오동동타령은 가수 권혜경이 57년 불러 히트한 '산장의 여인'과 짝으로 움직인다. 국립마산병원(마산결핵요양소)과 '산장의 여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다. 반야월이 마산결핵요양소에서 봤던 여자 환자를 모델로 가사를 만들었고 곡은 폐결핵으로 마산결핵요양소에서 투병하던 작곡가 이재호가 붙였다.
◆진주실비집
말 그대로 허름한 식당에서 '실비'(實費)로 술을 팔던 곳으로, 싸게 판다는 뜻의 '실비로 파는 집'을 뜻한다. 당시 안주는 정해진 것이 없이 주인장이 그날그날 장을 봐온 식재료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두었다가 술이 떨어지면 술과 함께 안주를 채워 주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다. 1970~80년대 시내 중심가인 중앙로터리 기업은행 뒷골목에 공짜로 안주를 제공하던 '옥이집' '남이집'과 계동의 안주 값이 싼 '화랑집' '신라집' 등의 술집이 실비만 받고 술을 팔았다. 현재는 원도심 이외에도 대단지 아파트 밀집 지역인 신안동 인근에 10여 곳이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도 정해진 상차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림표도 없고, 손님이 먹고 싶다고 특정한 안주를 시킬 수도 없다. 그냥 주인이 주는 대로 술상을 받아야 한다. 인근 시장에서 제철에 나는 것 중 싸고 많이 나는 싱싱한 식재료로 조물조물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새롭고 맛깔스러운 안주를 사시사철에 걸쳐 먹을 수가 있다. 실비집은 맥주를 중심으로 술값만 받고 안주는 무제한 공짜로 주는 방식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주문 방식이 도입된다. 상대동에 있는 실비집 '술시다 드루와'는 예약 필수다. 2인상 4만원, 3~4인은 5만원을 안주 값으로 내고 소주맥주는 병당 6천원이다.
사람한테 받은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술. 지옥으로도 안내하지만 잘만 운전하면 이놈만큼 곧이곧대로인 물성도 없을 것 같다. 누군 술이 없으면 제주(祭主)도 없고 그래서 하늘의 사정을 땅이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멀리서 보면 술집도 한 송이 '꽃' 아닌가.
wind30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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