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성화고 명문 대구공고 개교 100주년…대한민국 산업화 인재 6만여명 배출

식민 치하·한국 전쟁 지나 실업계 오랜 전통 이어와
우리나라 산업화의 역군…대구공고를 빛낸 동문들

대구공고 전경. 대구공고 제공
대구공고 전경. 대구공고 제공

'성실, 창의, 협동'

대구공업고등학교의 교훈에는 학교가 오랜 시간 품어온 역사가 응집돼 있다. 대구공고는 일제 강점기, 6·25 전쟁, 2·28 학생 의거, 4·19 혁명 등 대한민국의 굴곡진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수업이 중단되고 재개되기를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학교는 공업 교육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 결과 대구공고 출신 동문들은 국내 산업 발전을 이끌어 온 주역이자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 직업 교육의 산실인 대구공고가 오는 4월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대구공고의 지난 100년의 발자취를 짚어봤다.

◆지역 최초 공업계 실업학교 탄생

대구공고는 1925년 4월 1일 일제의 전쟁물자 생산에 필요한 인력 양성의 목적으로 수업연한 2년의 '대구공립공업보습학교'(대구 중구 장관동)로 출발했다. 대구공고백년사에 따르면, 설립 당시 학교 건물은 목조로 된 단층 기와집으로 교실, 실습장, 교무실이 한 건물에 배치된 초라한 시설이었다. 학과는 가구과 1학급, 모집 정원 20명이 전부였다. 국어(일본어), 수신(修身), 영어, 수학, 체조 등을 공통 과목으로, 실습, 제도, 제작법, 공예사 등을 전공 과목으로 했다.

대구 지역에는 농업 계통의 '대구공립농림학교'와 상업 계통의 '대구공립상업학교'가 실업계 학교로 있었으나, 공업계 실업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은 학교는 대구공고가 최초였다.

대구공고는 1938년 수업 연한 3년의 '대구공립직업학교'로 명칭을 바꿔 현재 신암동 부지로 교사를 이전했다. 당시 토목과, 목공전수과가 신설됐고 1939년 기계과, 1940년 광산과가 추가로 증설됐다. 이후 1944년 수업 연한 4년의 '대구공립공업학교'로 승격되며 항공기과도 설치됐다.

이 시기는 전국에 '전시체제령'이 내려진 일제 말기로 신사 참배와 일본식 성명강요(창씨개명) 등 일제의 민족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다. 대구공고 학생들 또한 전쟁 물자 생산에 강제로 투입되고 언제든 전쟁에 투입될 수 있는 군인으로 양성되기 위해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즉 당시 학교는 전쟁 수행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후인 1946년 미군정 하의 조선교육심의위원 방침에 따라 수업 연한 6년(중등과 3년·고등과 3년)의 '대구공립공업중학교'로 교명과 학제가 바뀌었고, 6·25 직전인 1950년 수업 연한 3년의 '대구공업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후 수차례 교육과정 및 교육체제 개편, 학과명 변경 등을 거치며 현재 분야별 특성화된 직업교육기관인 '특성화고등학교'로 자리잡게 됐다. 2021년에는 대구 최초로 고교 캠퍼스형 분교인 '테크노폴리스캠퍼스'를 개교했다. 본교 7개 과(자동화기계과, 친환경자동차과, 건설과, 스마트전기과, 바이오화학과, 스마트융합섬유과, 스마트공간건축과) 및 분교 2개 과(IT콘텐츠과, 조리제과제빵과)에서 우수한 전문 직업인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학교 빛낸 자랑스러운 대공인(大工人)

대구공고는 현재까지 동문 6만여 명을 배출하며 수많은 인재와 걸출한 인물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대구공고 최고 전성기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3년이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공고지만 3년 연속으로 매년 졸업생 1천400명을 넘긴 적은 이때가 처음이다. 우리나라 산업화 격동기에 얼마나 많은 인재 산실 구실을 했는지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류찬우(14회) 동문은 1968년 풍산그룹의 모태인 풍산금속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한국 비철금속산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국내 최초의 현대식 신동(伸銅) 공장으로,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각종 동(銅) 소재를 생산해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귀뚜라미그룹 회장인 최진민(30회) 동문은 1960년대 구들장 온돌을 '파이프 온돌' 방식으로 혁신하며 온돌 난방의 근대화를 실현했다. 1970년대 기름보일러 'KS 1호'를 개발해 표준화에 앞장섰고, 1980년대 일체형 기름보일러를 만들어 보일러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최순달(21회) 동문은 우리나라 우주 산업의 개척자로 불린다. 1981년 전기통신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며 시분할 전자교환기(TDX)를 국내 최초로 개발,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1989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인공위성센터를 출범시켜 한국 최초의 첫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 발사에 크게 기여했다.

대구공고는 전두환(24회) 전 대통령과 노태우(22회) 전 대통령 등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100년의 긴 역사를 지닌 만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자랑스러운 동문도 많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대구공고에 재학 중이던 학생 273명은 오직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도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 나가 참전했다. 대구 지역 학도병 중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또 1960년 2월28일 자유당 정권의 학원탄압에 맞서 싸운 '2·28 대구 학생민주화운동'에서 대구공고 학생들을 비롯한 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원 탄압의 부당성에 항거, 대구 젊은이들의 기개를 만방에 떨쳤다.

특히 대구공고 동문 김윤식(16회) 시인은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이라는 저항시를 발표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축구부·관악부 활약 학교 위상 높여

대구공고는 공업 교육 외에도 예체능 분야에서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오랜 역사와 빛나는 실적을 겸비한 축구부는 특히 유명하다. 대구공고 축구부는 1946년 3월 처음 창설됐다. 도민체전·전국체전 등에 출전해 학교의 명예를 대외에 높였으나 6·25 전쟁 등 사회적 혼란으로 유명무실해졌다. 그 후 1971년 동문들이 주체가 되어 재학생 14명과 신입생 특기 배정 학생 13명으로 구성된 축구부를 재창설했지만 이 또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맥을 잇지 못하다 1981년 4월 재창단식을 가진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축구부는 각종 전국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1998년 제42회 청룡기 전국고교 축구대회 준우승, 2000년 제19회 협회장기 초중고 축구대회 1위, 2010년 문화관광부장관기 전국고교축구대회 우승 등을 차지했다. 또 축구부의 활약으로 학교는 2002년 학교체육우수학교표창을 받기도 했다.

대구공고 축구부 출신들은 대학팀, 실업팀, 프로축구팀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신태용(59회) 동문은 2017~2018년 대한민국 축가 국가대표팀 감독을 거쳐 2020년부터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또 축구 국가대표 출신 남기설(60회), 김현수(61회), 곽태휘(72회) 등 뛰어난 선수도 여럿 배출했다.

관악부도 개교 이래 오랜 세월 교내 행사부터 지역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대구공고 관악부는 대한민국관악대회에서 10년 연속 금상 수상의 쾌거를 이뤘고, 2021년에는 대구 지역 학교 최초로 전체 대상인 교육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는 순수 동아리 활동만으로 이뤄낸 쾌거로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모범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관악부 단원들은 졸업 후 음악대학 진학을 비롯해 음악계에 필요한 전문 관악인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현동헌(67회) 동문은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경북대에서 음악을 전공한 후 성악가(테너) 및 공연제자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과 더불어 학교와 동문회의 꾸준한 지원과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석동 대구공고 총동문회 회장은 "동문회에서는 장학기금 확대, 개교 100년사 발간, 앱을 활용한 동문명부 제작 등 그동안 추진해 왔던 각종 사업을 마무리한 후에도 미래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는 학교 중장기 발전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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