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예술기행] 쿠바 산타클라라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 잠든 곳

산타클라라 체 게바라 기념관.팔에 깁스를 하고 소총을 든 채 수통을 찬 6m에 이르는 그의 동상이 보인다.
산타클라라 체 게바라 기념관.팔에 깁스를 하고 소총을 든 채 수통을 찬 6m에 이르는 그의 동상이 보인다.

◆산타클라라, 체 게바라의 도시

뤽 베송 감독의 '제 5원소'에서 릴루의 이 대사를 들으며 난 잠시 숨을 멈췄던 기억이 있다. 'What's the use of saving life when you see what you do with it?(생명을 지켜봤자 무슨 소용이죠? 다시 파괴할 텐데…)' 외계에서 날아와 지구와 인간을 보호할 제 5원소(quintessential, 고대 과학이론의 에테르)인 그녀가 세계역사와 전쟁을 검색하곤 절망스럽게 읊조린 대사다.

이것은 곧 신이 살육과 파괴를 일삼는 인간을 보호할 가치가 있겠냐는 말이다. 영화는 1997년 개봉되었고, 세계대전, 6.25, 걸프전, 아프리카 내전, 러·우전쟁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나는 현실이 극히 척박하단 생각이 들 때마다 DVD를 꺼내 이 영화를 다시 본다.

산타클라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바티스타정권을 전복시킨 혁명의 최격전지로 승리를 거머쥔 거점이다.
산타클라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바티스타정권을 전복시킨 혁명의 최격전지로 승리를 거머쥔 거점이다.

지금 세계는 도처가 전쟁터다. 포탄과 총알이 날아다니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또한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심상찮다. 그러다가 문득 최근 우리나라와 수교를 한 쿠바 산타클라라에서의 하루를 떠올린다.

작금의 세계 상황이 불러온 기억이 분명한데, 2017년 1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뉴욕에서 아바나 동쪽으로 280여㎞를 달려 산타클라라에 갔다. 늦은 밤이었다. 숙소는 여전히 소란했고, 그 소란에 휩쓸려 여권을 잃어버릴 뻔한 사건도 문득 떠올라 씁쓸하지만 산타클라라의 대기는 매캐하던 다른 곳들과 달리 청량했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

산타클라라를 돌아다닌 이튿날은 종일 비가 내렸다. 비야클라라주의 주도로 쿠바의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는 소박했고, 그곳 사람들도 다소 부담스럽게 쾌활하던 아바나 쿠바노스와는 달리 이방인들을 수줍게 바라봤다. 25만 명 인구를 가진 쿠바 다섯 번째의 도시라는데 비 탓인지 한산했다.

외항(外港) 시엔푸에고스까지 철도로 갈 수 있다는데 일정상 그곳은 가지 못했다. 산타클라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바티스타정권을 전복시킨 혁명의 최격전지로 승리를 거머쥔 거점이다.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사살당한 체 게바라의 시신을 1997년 옮겨와 재매장하고 기념관이 지어진 후 산타클라라는 오롯이 체 게바라만을 추앙하기 위해 존재하는 도시가 되었다.

다소 민망스럽지만 다른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쿠바로의 여행은 빔 밴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 소설가 헤밍웨이의 흔적들 그리고 체 게바라의 신화가 나를 이끌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물론 아바나에서부터 거리를 메우는 재즈와 코이마르의 헤밍웨이, 눈길 닿는 곳마다 새겨진 체 게바라의 모습, 티셔츠, 엽서, 하물며 열쇠고리와 양말에까지 그려진 그들의 얼굴로 그 열망을 만끽했음도 고백하겠다. 하지만 산타클라라 체 게바라 기념관 앞의 팔에 깁스를 하고 소총을 든 채 수통을 찬 6m에 이르는 그의 동상을 보았을 땐 그저 숨이 턱 막혔다.

체 게바라 동상에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체 게바라 동상에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혁명 내전이 치열했던 비달광장 건물 외벽의 선명한 총탄 자국과 선로를 이탈한 부서진 무장열차, 거대한 동상 옆 그의 편지가 새겨진 거대한 벽을 바라볼 때도 그랬다. '… 나는 쿠바 땅에 국한된 쿠바 혁명에서 내 몫을 다했다는 느낌이네. … 장관과 사령관직 모든 직책과 시민의 모든 권리도 포기하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 쿠바를 떠나며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를 새긴 벽이다. 기념관은 그의 유품들과 사진들이 가득하고 묘지는 볼리비아에서 죽은 병사들과 함께 묻혀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 슈퍼스타의 성지(聖地)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다. 1928년 6월(5월) 14일 아르헨티나 산타페 로사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1951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모터사이클로 남미대륙 횡단여행을 하다가 제국주의 자본가들이 독점한 농장과 광산에서 쇠사슬에 묶여 채찍을 맞으며 노역하는 노동자들을 보고 각성해 수많은 세계 혁명에 뛰어들었다.

어린이를 안고 있는 체 게바라.
어린이를 안고 있는 체 게바라.

노예검투사이자 혁명가인 스파르타쿠스를 가장 존경하며 의사로서 사람들을 치료하기보다 세상의 모순을 치료하겠다는 일념으로 과테말라, 쿠바, 콩고, 볼리비아 내란에 참전했다.1958년 12월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와 의기투합해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직후 대사로 파견되어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미국이 피그스만 침공을 일으키자 이에 대한 군사 대응도 지휘했다.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장관으로 농업국 쿠바를 산업화하려 했고, 당시로선 획기적인 의료 개혁도 단행해 '쿠바의 두뇌'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사형제도를 부활시켜 친서방 또는 반혁명세력 약 1만4천명을 처형한 것이나 서투른 산업 국유화로 인한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로 쿠바가 가난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소련의 브레즈네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행동 등으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 콩고로 간다. 카스트로 형제와의 불화 때문이란 주장도 있지만, 또 다른 혁명을 위해 간 그곳에서 그는 처절한 실패를 겪고 간신히 탈출한다.

1966년 다시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대머리 사업가로 변장해 볼리비아로 가지만 소련에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무시했고 그 지도자는 지휘권을 두고 그와 갈등했다. 볼리비아 빈농들조차 백인인 그를 믿지 않던 와중인 1967년 10월 8일 최후의 결전에서 17명의 대원과 함께 미국이 지원하는 레인저부대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고 만다.

무장열차 기념공원은 게바라가 쿠바혁명의 결정적 승기를 잡은 마지막 전투현장으로 기념비와 열차 탈취에 사용한 불도저, 전복된 정부군 화물열차가 전시돼 있다.
무장열차 기념공원은 게바라가 쿠바혁명의 결정적 승기를 잡은 마지막 전투현장으로 기념비와 열차 탈취에 사용한 불도저, 전복된 정부군 화물열차가 전시돼 있다.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인물', '쿠바 혁명 성공 뒤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함' '쿠바 혁명 직후 반대파 숙청과 처형을 지휘한 자', '20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장 폴 사르트르)' '총을 든 예수', '롤렉스시계를 찬 혁명가' 등 세계적 위인 대다수에게 그러하듯 그에게도 이렇게 긍정과 부정적 평가가 뒤따른다.

별 하나가 새겨진 검은 베레모에 구겨진 군복, 시가를 입에 문 '젊음과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의 사진을 찍은 알베르토 코르다가 저작권을 포기해 '젊어서 죽은 혁명가로 대단한 미남'이었던 그의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전 세계에 복제, 배포되었다.

결국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그였으나 훗날 '자본주의자들에게 의해 상품화가 되어 자본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 슈퍼스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씁쓸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체 게바라 성지(聖地) 산타클라라에서 그의 거대한 동상과 부서진 무장열차, 편지가 새겨진 벽을 보면서 느낀 나의 그 숨막힘이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시인)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