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김교영] 필론의 돼지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이문열 작가의 단편 소설 '필론의 돼지'(1980년 발표)의 대략은 이렇다. 전역 군인들이 탄 열차에 '검은 각반들'(특수부대 군인을 상징)이 등장한다. 그들의 험악한 행동은 객차(客車)를 '공포의 침묵'으로 만든다. 검은 각반들은 노래를 불러 주고, 제대 군인들에게 돈을 뜯어낸다. 몇몇의 불한당(不汗黨) 앞에 다수는 그저 무력할 뿐이다. 제대 군인들은 대거리하지 못한다. 서로 눈치만 살핀다. 헌병이나 철도공안원이 그들을 제지해 주길 바란다. 공권력은 필요할 때 나타나지 않는다.

주인공 '그'와 '홍덕동'도 마찬가지다. "아, 나의 팔은 너무 가늘고 희구나, 내 목소리는 너무 약하고, 내 심장은 너무 여리구나, 저들의 폭력을 감당하기에는. 학대받고 복종하는 데 익숙한 내 동료들을 분기시키기에는." 대학물을 먹은 '그'는 자괴감(自愧感)을 느낀다. 마침내 한 사람이 숨죽였던 제대병들을 일깨워 검은 각반들을 응징한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린다. 눈먼 분노가 잔인한 폭력으로 표출된다. 이를 말리는 목소리는 폭력의 광기(狂氣)에 묻힌다. 이성은 사라지고, 증오가 객차를 지배한다. 주인공은 현자(賢者) '필론'이 폭풍우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 봤다는 돼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 소설은 검은 각반의 폭력을 소재로 다뤘다는 이유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얘기를 썼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필론의 돼지'는 고대 그리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필론의 기록에서 유래(由來)됐다. 폭풍우가 닥친 배는 지옥이다. 사람들은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친다. 필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지혜로울까 생각한다. 문득 자기가 데려온 돼지가 짐칸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필론은 말한다. "현자는 저 돼지처럼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고.

'필론의 돼지'는 중의적(重義的)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나서지 않고 평정심(平靜心)을 유지하는 게 현명하다는 교훈으로 읽힐 수 있다. 또 현실을 외면하는 '나약한 지식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이 난파(難破) 위험에 놓인 배와 같다. 선과 악이 뒤엉키고, 거짓이 진실을 짓밟는다. 어제의 정의가 오늘엔 불의가 된다.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 용기가 없으면 상식조차 말하기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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