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간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개원을 하니 보람도 크지만, 때로는 몸과 마음이 지쳐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잊지 않고 떠오르는 것이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이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이라는 구절처럼, 우리가 매일 걷는 길이 단조로운 반복 같아 보여도 그 안에는 새로운 의미와 도전이 숨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아침에 출근해 환아를 진료하고 저녁 무렵 퇴근할 때까지,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듯해도, 아이들과 부모들의 표정과 이야기는 하루하루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어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웃고, 또 어떤 아이들은 아픔을 호소하며 조용히 기대온다. 그 다양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내 마음 역시 깊은 울림으로 채워진다.
발달이 늦어 찾아온 아이에게 검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설명하다 보면 어머니들이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이 많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그 눈물 속에 담긴 걱정과 슬픔, 그리고 간절한 바람을 조금씩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함께 고민하고 위로하며 작은 희망이라도 찾으려 애쓰다 보면 오히려 내가 배움을 얻고 마음의 위안을 받기도 한다.
3년간 발달센터를 운영하면서, 절망 속에서 온 아이들이 조금씩 성장하고 밝아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아이들이 달라질 때마다 부모의 마음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그것이 곧 한 가정의 희망이 된다는 사실이 늘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정년퇴임을 몇 해 앞두고, 늘 조용하던 내 표정이 발달 지연이 있는 아이들을 진료한 뒤에는 한결 밝아진다고 아내가 말해 주었다. 그때부터 정년 후에는 아이들의 발달을 돕는 진료센터를 여는 꿈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9년 독일 뮌헨, 프랑크푸르트, 에푸르트의 아동발달센터에서 연수하며 선진 시스템을 직접 접하고, 귀국해 병원에 아동발달센터를 세우려 했지만 의료보험 제도 등의 문제로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 늘 미련과 빚진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결국 작은 병원을 열어 3년간 운영해 보니, 비록 규모는 작아도 더 큰 책임과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완비된 항공모함 같은 대형 병원에서 근무할 때와 달리, 이제는 돛단배를 혼자 이끌어 가는 심정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배우는 것이 많다.
독일 뮌헨의 사회아동발달센터(Sozial Paediatrischen Zentrum: SPZ) 입구에는 작은 놋쇠 배 조형물이 서 있는데, 노아의 방주를 상징하며 아이들을 폭우 같은 역경에서도 지켜주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독일에서는 아이가 발달이 늦으면 아이의 문제뿐 아니라 그 가정에 숨은 어려움이 있는지 필히 확인하고,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나선다.
우리나라 역시 산모의 약 20%가 산후 우울증을 겪으며,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아이와의 상호작용이 줄어들어 자폐증과 유사한 증상이 생길 수 있다. 또 이런 상황이 방치되면 심각한 발달지연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겉으로 문제가 없어 보여도 육아 갈등 속에서 아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늘 유념해야 한다.
최근 기후 변화로 봄꽃들도 타이밍을 놓치고, 기록적인 산불로 두려움과 불안이 커졌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우울감이 확산되는 시기에 들려온 출산율 상승 소식은 반가우나 산후 우울증 증가가 걱정된다. 하지만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가듯이, 매일 같은 길을 걷더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한 걸음씩 내디디며 배우고 성장하는 우리가 있을 때, 사회도 성숙해지고 아이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때로는 문제가 겹겹이 쌓인 듯 보여도, 함께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마음이 이어지고 치유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복잡한 도전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부모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눈물과 웃음을 나누는 일은 내게 매일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이 길 위에서 서로가 힘이 되고, 아이들의 작은 발걸음이 더 큰 변화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내가 걷고 싶은 꿈과 품의 길이다.
언젠가 이 길이 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길 바라며, 나는 내일도 흔들림 없이 진료실 문을 열 것이다. 아이들과 부모의 따뜻한 꿈을 품으며, 우리 모두가 새롭게 나아갈 길을 함께 만들고, 한 걸음씩 조금씩 더 힘차게 내디디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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