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일상화'(日常化)를 피해야 한다. 일상화는 영어 banality를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를 김선욱 교수가 2006년에 '평범성'이라는 말로 번역했고 김 교수의 번역을 학자들과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쓰다 보니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일상화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확(的確)하다.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의 상급 지도자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인 홀로코스트, 즉 대학살을 실행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동유럽의 학살 수용소로 추방했다.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아르헨티나로 잠적했다가 15년 후인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었다.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후 열린 재판에서 1962년 5월 29일 사형이 확정됐고 3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13개월간 진행된 재판을 참관한 아렌트는 1965년에 책을 펴냈고 김 교수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번역했다.
영어 banality를 평범성으로 번역한 것은 아이히만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평범성이라고 번역할 경우 평범한 척하는 가식(假飾) 뒤에 숨은 엄청난 악을, 그리고 흉악범들이 겉으로는 대게 평범하게 보이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이것은 저자인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김 교수는 주요어를 평범성으로 번역했지만 악행의 반복으로 악에 무감각하게 된 '악의 일상화'가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본다.
아이히만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따랐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부당한 명령을 수행한 것, 즉 수백만 명을 독가스실로 보내는 서류에 서명한 행위에서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보호하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저열(低劣)한 민낯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절대 평범하지 않으며 마땅히 처벌돼야 한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충실했으므로 자신의 행위가 죄가 되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왜 아르헨티나로 도주했으며 15년간이나 숨어 지냈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죄가 되는 줄을 알았으며 당연히 양심의 가책도 느꼈다고 보는 것이 사리(事理)에 맞다.
그리고 아이히만과 같은 상급 지도자들은 히틀러로부터 유대인 학살 명령을 직접 들은 이른바 '비밀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은어(隱語)를 사용했다. 학살은 '최종 해결책'으로, 유대인 이송 작업은 '재정착'으로 불렀다. 왜 그랬을까? 아렌트의 주장처럼 그들이 지닌 '말의 무능' 때문인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로 봐야 한다. 은어를 쓴 것은 외부인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알면서 잘못을 저질렀음을 자인(自認)한 셈이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자신들의 엄청난 학살 행위를 언어로라도 가리고 순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니다. 아이히만은 조직 내부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잘도 생각했고 철저히 공감했다. 단지 피해자들의 관점에서만은 생각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철저히 편파적인 사람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저자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번역자는 주요어를 오해의 소지가 있는 평범성으로 번역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악행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언급을 회피하며 은어를 쓸 정도였다. 그러나 사형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몽상가인 체하며 재판 관계자와 아렌트를 포함한 참관인, 나아가서 세상 사람을 기망(欺罔)했다. 악행의 반복으로 악이 일상화된 사람의 전형(典型)이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악이 일상화된 제2의 아이히만들로 인해 봄은 봄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악의 일상화를 피할 수 있을까? 거짓말하는 데서 악의 일상화가 시작된다. 사회 통념에 맞지 않거나 불법적인 언행을 하고 나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러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궁핍한 상황에 자신을 갖다 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내면의 평안을 얻을 수 있고 사회가 맑아진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자식이 자식다운 세상은 언제 오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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