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삶의 터전이 사라졌다…청송 이재민들 '절망 속 사흘째'

"집도, 일터도, 미래도 잃었다"…청송 이재민들 눈물의 하루
50년 일군 농장, 5분 만에 사라졌다…청송 산불 '참사'  

산불 진화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경북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 모습. 박상구 기자
산불 진화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경북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 모습. 박상구 기자
지어진 지 300년이 넘은 국가지정 민족문화유산 사남고택이 산불에 전소된 모습. 박상구 기자
지어진 지 300년이 넘은 국가지정 민족문화유산 사남고택이 산불에 전소된 모습. 박상구 기자

불에 탄 마을과 대피소를 오가는 청송 주민들의 얼굴엔 피로와 허탈감이 가득했다. 잔불을 정리하는 이들의 발밑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살아남은 가축조차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수억 원대 피해는 물론이고 전기, 수도, 통신까지 끊겨 복구조차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 복구는 엄두도 못 낼 수준이고, 당장 생계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무엇부터 복구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주민들의 호소는 절박했다.

특히 청송의 대표 관광지인 주왕산 국립공원과 달기약수터, 사남고택 등 주요 문화재도 불길에 휩싸이면서 피해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평생 일군 모든 걸 잃었다"…주민 망연자실

27일 청송 파천면 일대에서 만난 주민들 대부분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들은 불타버린 집 앞에 서서 피해액을 계산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50여 년간 병부리에서 농사를 지어온 최동순(70) 씨는 이날 점심도 거른 채 소방대원들과 함께 잔불을 정리했다. 까맣게 탄 짚더미는 한참 동안 물을 뿌려도 계속해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최 씨는 이번 산불로 집 3채와 창고, 돈사, 사과밭 등을 모두 잃었다. 다행히 우사에 있던 소 30마리는 살아남았지만, 염소 7마리는 창문과 문 근처에서 타 죽은 채 발견됐다. 창고 지붕이 무너져 내려 가축의 사체를 수습하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최 씨는 "평생 일군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처음 현장을 봤을 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며 "대략 계산만 해도 8억 원 이상의 손실"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살아남은 소 30마리가 당장 걱정이라고 했다. 창고에 보관하던 여물 수십t이 모두 타버렸고, 단수까지 겹쳐 소들이 사흘째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속은 이날 오전 10시, 소방차가 경운기에 물을 쏟아놓고 간 뒤에야 겨우 진정됐다.

병부리 이장 김정숙(66) 씨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김 이장은 이번 화재로 병부리에서 주택 28채와 창고 50동이 전소됐다고 전했다. 전기와 통신은 물론 수도도 사흘째 복구되지 않아 주민들은 대피소와 마을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김 이장은 마을 복구도 막막하지만, 당장 주민들이 생계 수단를 이어갈 방법도 마땅찮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앞으로가 걱정이다. 사과나무는 연기를 한 번이라도 머금으면 꽃을 잘 피우지 못한다"며 "대부분의 과수원 나무를 베어 내야 할 것이다. 나무를 다시 심는 데만 수천만 원이 들고, 정상 수확하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울상을 지었다.

김숙기(70) 씨는 대피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불로 된 거대한 산이 순식간에 마을로 덮쳐왔다"며 "청송휴게소 건물을 넘은 불길이 억새밭을 타고 2~3분 만에 마을까지 도달했다. 짐을 챙길 시간도 없이 사람들만 차에 태우고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이 지역의 한 식품공장도 큰 피해를 입었다. 된장 등 전통식품을 생산하는 A업체는 이번 화재로 공장 6동과 비닐하우스 8동을 잃었고, 장류를 보관하던 옹기 수백 개도 파손됐다.

A업체는 화재가 청송으로 번지기 전부터 공장 주변에 물을 뿌리는 등 방화대책을 마련했지만, 피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A업체 관계자는 "2~3년치 생산을 위한 원료 수십t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전부 쓸 수 없게 됐다"며 "영업 재개 시점을 알 수 없고, 당장 입은 손실만 100억 원대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송 주민들은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27일 경북 청송군 파천면 한 민가 모습. 박상구 기자
청송 주민들은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27일 경북 청송군 파천면 한 민가 모습. 박상구 기자

◆청송 주요 관광지·문화유산 피해 심각

문화재와 관광지 피해도 심각하다. 주왕산 국립공원은 2천㏊ 이상이 소실됐고, 국가 지정 민속문화유산인 사남고택과 경북유형문화유산 만세루도 전소됐다.

27일 오후 1시, 사남고택은 완전히 불에 타 기왓장만 바닥에 남아 있었다. 집 앞 소화전과 연결된 주황색 소방호스는 말라붙은 채 검은 재가 묻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기와집과 초가가 나란히 있는 이 고택은 18세기 건물로, 약 300년 만에 전소됐다. 사남고택과 약 10m 남짓 떨어진 서벽고택은 불길이 건물 옆쪽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일부 소실됐다.

사남고택이 있는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는 평산 신씨 집성촌으로, 약 100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사남고택뿐 아니라 마을 민가의 절반 이상이 불길에 휩쓸렸다.

고택 주인 신응석 씨는 지난 25일 화재 당시 고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불길을 목격하고도 집이 타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 씨는 "기와집 옆 초가에 있었는데 불이 너무 빨라 대처할 시간조차 없었다. 경보기가 울리고 소화전을 연결하는 사이 초가부터 전소됐다"며 "밖에는 연기가 가득해 질식할 것 같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차 열쇠가 초가에 있어 맨발로 도로까지 뛰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고택에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서예 작품 등이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신 씨는 "대부분 물건은 국학진흥원에 기증했지만, 우복 정경세의 글씨 등 일부 국보급 자료는 그대로 뒀다. 그것들까지 전소돼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청송 주왕산 국립공원의 피해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날 오전 11시 기준, 주왕산 국립공원 입구는 차량 출입이 통제됐다. 도로가 좁아 진화 차량이 교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송 대부분 지역이 이미 산불로 검게 타버린 상황에서 주왕산은 여전히 불길과 싸우고 있었다. 여러 대의 소방헬기가 1분 간격으로 기암과 장군봉 상공을 오가며 물과 지연제를 투하했지만, 연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탐방지원센터와 화장실 등 공원 내 주요 시설 3곳이 전소됐고, 산림 피해는 2천㏊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날 당국 추정치였던 1천㏊보다 두 배 늘어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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