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의성군 거점 대피소인 의성체육관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일부 지역에서 부분 재발화가 일어나긴 했지만, 주불 진화 전까지 감돌았던 긴장감은 사라진 뒤였다.
일시 대피소에 남은 주민들도 대부분 짐을 쌌다. 의성군에 따르면 이 곳에 남은 주민은 30일 오전 기준 50명이 전부다. 산불의 기세가 최고조였던 지난 26일에는 이 곳에 333명이 머물기도 했다.
남은 이들은 대부분 집이 완전히 불에 타 돌아갈 곳이 없거나 살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이들이다.
지난 25일 단촌면 하화리에서 급하게 몸을 피한 김왜선(77) 씨 역시 대피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길이 단촌면 일대를 집어 삼키던 지난 26일, 김 씨는 가게와 집을 고스란히 잃었다. 집이 있던 자리에 남은 건 기둥과 잔해, 잿더미 뿐이다.
"불길이 보이긴 했는데 길가에 가게 있는데다 주변에 소방차도 4대나 있었고, 소화전도 가까이 있어서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모두 타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죠."
불이 난 집터는 50년 넘게 살았던 터전이었다. 시조부모를 모시고 4대가 함께 지내며 억척스럽게 살았다. 세 아이 학비를 마련하려 집 앞에 가게를 지어 동네슈퍼를 했고, 농번기에는 논밭으로 점심 배달도 했다.
김 씨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100~150인분을 밥을 지어 날랐어요. 새참으로 빵과 우유를 300개씩 팔았죠. 벼농사도 따로 짓고 참 열심히 살았어요."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는 '베풀며 살자'는 마음으로 봉사 활동도 열심이었다. 오랫동안 봉사단체 회장을 지냈고, 복지시설에서 정기적으로 청소나 무료 급식 봉사도 해왔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삶 자체를 허탈하게 느끼고 있었다. "잠 잘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러워요. 자식들은 함께 서울로 가자는 데, 막상 내 집이 불타고 없어지니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따라가기 싫어요."
무엇보다 김 씨의 마음을 가장 무겁고 아프게 하는 건 그동안 모아둔 삶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자녀들이 어린 시절부터 틈틈이 찍은 사진과 가족 여행 사진들, 서예에 능통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남긴 작품과 생전 모습들, 시댁 어른들의 얼굴 등 옛 기억을 되살려줄 모든 것들이 한 줌 재로 사라진 탓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사진과 물건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게 너무 원통해요." 먼 곳을 바라보는 김 씨의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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